InterView

인터뷰는 연기다.
철저히 연기하는 인물의 세계로 들어가 그 인물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가 왜 중간에 말을 끊는지 고민해야 하고,
그가 어떤 부분에서 말투가 바뀌는지 눈치채야 한다.

인터뷰는 연기가 아니다.
인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만, ‘나의 귀’를 완전히 지울 수 없다.
그의 생각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의 언어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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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감정의 집 짓기

[source: hollywood investigator]

집 없음(homelessness)의 감정학  

19세기에 헤겔은 이미 우리 인간의 존재가 ‘집 없음(homelessness)’과 다름없음을 꼬집었다. 여기서의 집(home)은 단순히 물리적 의미의 거처가 아닌, 그 이상의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헤겔이 말하고자 했던 인간존재의 속성은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돌아갈 그 어떤 곳도 없고, 그래서 모든 존재가 공허할 수밖에 없음을-인간 실존이 불완전함을 가리킨다.

인간 실존의 실체가 불완전함에 있다고 가정할 때, 인간의 감정 또한 이러한 속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붙잡고 싶어할 것이고, 자신이 붙잡은 것이 실존의 불완전함으로부터 구원해주리라 믿을 것이다. 설사 그 믿음이 여러 상황으로 인해 흔들릴 지 언정, 인간은 아슬아슬한 ‘집 짓기’를 시도할 것이다.

영화 <인 디 에어>의 주인공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 분)은 늘 자신의 집이 ‘비행기 안’이라고 답한다. 1년의 2/3 이상을 비행기 안에서 보낼 정도로 출장을 자주 다니는 그에게 오마하(Omaha)에 있는 원룸 아파트는 고정주소지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니, 그렇게 답하는 그의 심경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집에 안착하는 것(settling down)’은 라이언에게 있어 가장 지루한 삶의 형태이자,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그는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자신을 보며 그 어느 때보다 만족해한다. 그의 인간관계 또한 그 누구와도 ‘안착하는 법’이 없다. 모든 관계는 최대한 가볍게(casual) 가지는 것이 그의 철칙이다.

라이언은 이렇게 자신의 ‘집 없음’에 당황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집이란 건, 우리가 늘 매고 다니는 ‘배낭(backpack)’과 같은 것이어서 언제든 무거워지면 비워내면 그만인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집 없음’이 시대적으로 혹은 구조적으로 강요된 무엇이기 보다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라 굳게 믿는다.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Don’t take it personal)”

라이언이 이와 같이 ‘쿨’한 삶의 방식을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직업도 한 몫 했다. 그의 직업은 다름아닌 ‘해고 통보자’. 즉, 해고대상자에게 그 해고사실을 통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다. 라이언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애매한 상태를 넘길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 “애매한 상태”에 해고대상자가 겪는 최고조의 감정치도 포함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라이언이 해고대상자에게 가장 흔하게 뱉는 말 중의 하나는 해고 통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해고는 해고일 뿐이지, 해고대상자 개인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일까? 혹은 해고는 이성적으로 접근할 일이지 이를 감정적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는 뜻일까?

여기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가정 하나는 ‘해고’와 ‘해고대상자’를 무관한 것으로, 또한 ‘감정’과 ‘이성’을 별개의 것으로 가르는 이분법이다. 정말 이것들이 서로 무관한 것일까? 전혀 맞닿지 않는 별개의 것일까? 그 근본을 파헤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다. 바로 자본주의라는 사회의 구조가 개개인의 감정을 조정하게끔 만든다는 사실이다. 가장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순간(해고의 순간)에 ‘감정을 앞세우지 말라’는 조언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자본주의의 룰과 그들의 어법

영화에서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룰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맞부딪히는 경험치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라이언이 속한 회사는 ‘해고대행사(?)’인만큼 경기가 장기침체 되어 많은 기업들이 대량해고사태에 처하게 됨을 기뻐한다. 누군가의 추락이 누군가의 축배가 되는 상황을 맞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 변화는 라이언의 회사 내에도 불어 닥친다. 해고 통보자들이 해당 회사를 직접 찾아가는 경비를 줄이는 일환으로 ‘온라인 해고시스템’이 개발된 것이다. 비행사 마일리지를 쌓아 최고의 고객이 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라이언에게 이와 같은 변화가 달가울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아무리 ‘쿨’하고 좋은 실적을 가진 해고통보자라 할지라도 컴퓨터 화면 상으로 누군가에게 해고 통보를 한다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맞서 라이언이라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룰을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앞으로 전진하거나 뒤로 후퇴하거나. 그의 선택지에는 단 두 가지만의 옵션이 주어질 뿐이다. 라이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차가운 현실을 되도록이면 우회적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해고대상자에게 절대로 “해고되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당신을 보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몇몇 해고대상자들은 라이언의 ‘우회적 화법’에 더 분노하고 절망한다. 하지만 라이언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것 밖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므로.

감정적 순간의 감정을 탈각시키는 것, 면대면(face-to-face)의 순간에 제3자를 개입시키는 것. 이 모든 기획의 이면에는 감정까지도, 인간의 관계까지도 자본화할 수 있다는 현대의 구조적 자신감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렇듯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자본주의의 실타래는 쉽게 누군가를 탓하게 만들 수도, 일방향적인 해법을 제시할 수도 없게 만든다.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집 없이 떠돌아다님을 오히려 ‘근사한 시대적 운명’이라 여기는 라이언에게 ‘집을 가지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권하는 것만큼 촌스러운 제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헤겔의 ‘집 없음’에 대한 성찰도 불완전한 실체를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집 있음’, 즉 완전한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한 반대급부로서 등장한 개념임을 상기해본다면, 그러한 질문이 그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 아닐까.

불완전한 인간의 존재와 (자본주의라는) 불완전한 시스템 사이를 부유하는 가운데서 완전한 실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단서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단서가 없다고 해서 그 실체까지도 부정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감정을 이성으로 치환하라고 강요 받는 것이 비단 자본주의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던가. 인간사의 복잡다단함을 한 줄로 정리하라고 주문하는 것이 비단 오늘의 일이었던가. 아마도 인류의 역사를 찬찬히 뒤돌아본다면, 불완전한 실체의 집을 부여잡고 헤매던 것이 지금 우리의 것만은 아님을 발견할 것이다. 다만 그토록 오랫동안 갈구했던 집을 아직 짓지 못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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