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 취미활동

 

몇몇 요리영화에 참여한 푸드스타일리스트의 세번째 책과 다달이 나오는 작은 요리잡지, 그리고 한 권의 무게있는 요리책을 샀다. 이들 사이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던 건 바로 이 요리책. 정갈하면서도 모던한 상차림이 한 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상황별로 메뉴를 구성한 것은 기존 요리책 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비주얼적인 부분(음식 이미지나 조리설명의 텍스트 디자인 등)도 최대한 깨끗하게 담아내려고 노력했다는 흔적이 보이고, 선별된 메뉴들도 인터넷 검색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레시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요리책에는 웹에서 찾을 수 있는 레시피들처럼 상세한 과정샷이 첨부되어 있지도 않고, 요리 프로그램처럼 한 번에 이해가 갈 수 있는 요소가 있지도 않지만 각각의 저자가 생각하는 요리의 색을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색을 좋아하느냐 아니냐는 물론 각자의 몫이겠지만, 최소한 처음과 끝이있는 하나의 완성본으로서 선 보인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한참동안 보지 않은 책이 쌓여만 가고 그것들을 다시 펴 볼 여유가 없다고 느껴지는 이 순간에도 누군가 한참동안 고심해 칠한 색의 한 페이지가 궁금하기에 이 오래된 습관을, 그 상습적인 취미활동을 멈추지 못할 것만 같다. 그 색이 내 손을 통해 다른 이를 위한 그릇으로 옮겨질 기약없는 언젠가를 위해 스르륵하고 또 책 장이 넘어간다.

운수프레소


사람마다 그날그날의 운수를 점지해보는 습관이 다르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 중에는 화투점으로, 지인 중에는 아침마다 부치는 달걀프라이의 모양으로 그날의 향방을 가늠한다.

내게 있어선(매일은 아니지만) 에스프레소가 그런 역할을 한다. 한 곳의 단골카페를 만들기 보단 여러 카페를 두루 다니는 것을 선호하는 까닭에 에스프레소 한 잔에 그날의 운수를 점쳐볼 기회가 온다.

단순한 논리지만 맛이 좋으면 귀인이라도 만날 것 같은 예감이, 그렇지 않으면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든다. 안타까운 사실은 맛이 좋은, 정확히 말에 내게 좋은 맛을 안겨주는 에스프레소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류원두를 쓴다고 자부하는 커피전문점에서도 실망스러운 에스프레소를 내놓는 반면, 수많은 커피체인점 가운데서도 제대로 된 바리스타를 만나면 다섯 잔이고 연거푸 마시고픈 충동을 일게 한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보건대 맛 좋은 에스프레소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굉장히 적다.

어제 오랜 만에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형서점 내의 커피체인점에서 맛 본 싱글 에스프레소(잘 모르는 곳에서의 더블은 위험부담이 크다)는 근 몇년 간 마셨던 에스프레소 중 단연 으뜸이었다.

신 맛과 쓴 맛이 적당히 제거되고 부드러운 진함만이 남아있던 단 두 모금의 싱글샷엔 어제의 운수 뿐만이 아닌 삼라만상의 진리가 담겨있는 듯 했다. 그저 스쳐가는 수백명의 손님 중의 하나일 뿐인 나에게 고귀한 커피응축액 몇 방울을 제공해준 그 바리스타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종종 에스프레소는 남자의 음료다라고 우기는 이를 보기도 하고, 한약같은 걸 왜 돈을 주고 사 마시냐며 마뜩찮게 여기는 이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내게 에스프레소는 내 미각이 합을 이루는 지점을 상기시켜주는 나침반과 같은 존재요, 한 식재료가 가진 맛의 정수를 기교없이 내어주는 리스머스지와 같다. 거기다 평범한 일상에 이따금 이유 없는 운수대통’감’을 안겨주니 무얼 더 바라겠는가.

맛좋은 에스프레소를 많이 마시고 운수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날들이 많으면야 응당 좋겠지만, 운수란 게 삶이란 게 어찌 그러겠는가. 나만의 ‘운수프레소’가 그 진가를 발휘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강보라에 의해 창작된 운수프레소 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