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열변
사카이 나오키의 ‘디자인의 꼼수(원제: Plot of Design)’을 뒤적거리다 순간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불만의 모퉁이가 날카로운 신경을 툭툭 건드렸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좋은 건 이미 다 나왔기에 더 바랄 게 없는 게 오늘의 디자인이라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수용자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차려 입고 마중 나가야 알현할 수 있는 게 디자인’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어딜 가든 한 시도 쉬지 않고, 시각적인 오브제에 대해서 릴레이 코멘트를 날려대는 단짝친구 하나와 얼마 전 ‘더 이상 불평은 그만!’이라고 선언했건만, 제 버릇은 견공에게도 주지 못하는 법인가 보다. 디자인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기 전에, 답답한 가슴을 몇 번 쓸어 내려야겠다. (훅훅)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비(非)디자이너로서 난 지나치게 디자인에, 넓게는 시각적인 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눈 첫사랑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오랜만이네.’하며 생긋 웃으면서도 ‘어머, 저 구제불가능성은 어쩔거니. 그건 아방가르드도 아니다, 얘’하고 동공스캐닝을 마쳤으니 말 다했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것은 비단 지큐스런 훈계가 아니라, 억겁의 인류사에 근거를 댄 미학적 근거에 의한 외마디 비명이었으니. 게다가 혹자의 눈에는 ‘괜찮구만, 뭘’하고 오후께 참이 스르륵 넘어가듯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제 눈에 안경(상대성)이란 얘기다. 애니웨이, 비주얼이 가지는 자체의 의미와 영향력,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회학적 관계성에 주목하는 이로써 ‘작금의 사태’에 대해 울분을 표하고자 한다. 좋은 디자인은 덧붙일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포화상태의 필드에 ‘더 아름답거나, 더 특이하거나, 더 미니멀한’ 무언가를 보태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오늘의 디자인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와도 만나지 못하면서 생산라인에 불을 붙이는 디자이너의 마우스는 허공을 향해 무차별적인 광신호를 보내는 꼴이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 혹은 종말에의 고언이라도, 말이다.
문화로서의 디자인 – 디자인 서울
염치도 좋다. ‘디자인 서울’이랍시고 ‘디자인 선진국 투어’에 동대문 운동장까지 헐었는데, 뭐가 진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행정적인 비효율성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눈’ 혹은 ‘볼 줄 아는 눈’이 부재하는 가운데 어떤 의미 있는 작업을 기대할 수 있겠냐는 거다. 기존의 서울이 ‘비디자인적’이라고 보는가. 그렇다면 ‘디자인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온갖 난해한 수식어를 모두 떼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선상에서, 단 한마디로 설득할 수 있는가. 지금은 버릴 것과 살리고 갈 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를 중심축으로 도시가 가지는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발전 가능한 색채(개성)을 발견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트렌드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차용하면 서울은 결국 ‘이미테이션’에 불과할 것이고, ‘그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것’만 찾다 보면 이도저도 아닌 사생아를 만들게 될 것이다. 30년 넘게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카스퍼 쾨니히(Caspar Koenig)는 최근 방한해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공공미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 참여이며, 시민 참여를 이끌어내는 건 작품의 질이다.” 그의 말을 되새기며 디자인 서울을 논하기 전에, 공공미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라도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터페이스가 부재하는 예술과 디자인은 ‘신선놀음’에 불과하다. 서울을 (재)디자인한다는 발상 자체가 오만이다. 서울이 스스로를 디자인 할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할 때, 비로소 도시는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해 나갈 것이다.
디자인이 정치(인)를 지배한다.
생활로서의 디자인 – 국회
18대 국회가 오늘 부로 정식 개원했다. 혹자의 말로는 상정되어있는 안건만 해도 삼천여 건이 넘는다는데, 국회 정상화가 과연 며칠이나 갈지 심히 걱정이 된다. (더 솔직한 심정으로는 걱정도 안 된다. 일말의 기대심리가 있어야 걱정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디자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웬 뜬금없는 ‘국회’냐고 하겠지만, 통상적으로 정치 관련 뉴스가 나오면 그 ‘그림(찍힌 화면)’을 유심히 관찰하는 이로서 이번 문제를 좌시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수많은 디자인과 마주한다. 전적으로 디자인에 노출되어 있지 않는 시간은 없다. 그만큼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디자인은 남자건 여자건 아이이건 어른이건 상관없이 비교적 공평하게 ‘생활로서의 디자인’을 경험하게 된다. 어린 시절, 노태우 전 대통령이 여름철 하얀 마 소재(혹은 혼방) 반팔 셔츠를 입고 나오면(물론 노타이), 그 꼭두새벽부터 어찌 알았는지 국무회의에 앉아있는 이들 모두 꼭 같은 셔츠를 유니폼마냥 입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정치인들이 앉아서 회의를 하는 공간이라는 것도 천편일률적이어서(행정기관도 예외는 아니다) 무겁고 투박한(그리고 쓸데없이 번쩍거리는) 가구에 둘러싸여 있기 십상이다. 어떻게 보면 윽박지르고 멱살 잡고, 때때로 재떨이를 던지는 그들의 행동거지가 그 가구 디자인이 가지는 독성(물질)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일게 한다. 외국의 경우라고 정치판이 다를까 싶지만 서도 적어도 디자인적인 환경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아주 약간의 이해만 있다면 이대로의 디자인이 계속 방치되어도 괜찮을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제안 하나. 휴원 할 때는 열 일 제쳐놓고 내부디자인이라도 바꿔보면 어떨까 싶다. 있던 거라도 모두 치우고 밖에 있는 흙이라도 들여놓으면 사람 사는 공간 같고 좋을 것 같다. (싫음 말고)

역사로서의 디자인 – 독일
월간 ‘디자인’ 7월호는 독일 디자인을 특집으로 내세웠다. 한동안 침체되어있다거나, 기존의 이미지를 계속 고수한다는 식의 수동성 때문에 평가절하 받았던 독일 디자인의 현주소를 찾아보자는 취지에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일 디자인의 키워드는 ‘역사와 전통’이다. 먼지 폴폴 나는 정의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난 여기서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 또는 ‘디자인의 사명(운명)’을 느낀다. 디자인 뿐 아니라 독일 문화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점이지만 독일인들은 ‘시간의 켜’를 한 번에 뒤집을 수는 없다고 믿는다. 지금의 변화가 더디고 처진다고 느껴지더라도 시간과 세대를 거쳐 완성된 일종의 궤를 존중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야말로 오히려 더 진보적이고 더 자유분방한 시각적 표현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역사와 전통은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초다. 사사로이 여기거나 무시할 수 있는 성격이 것이 아니다. 흔히들 한국 디자인의 후진성과 불균형적인 수준에 대해 논하곤 한다.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우리의 위치를 간파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의 키를 잡았다면 내 세대에서 끝나지 않을, 다음으로 넘겨줄 수 있는 물음표 하나쯤 준비해두면 좋을 것이다.
계급으로서의 디자인 – 호텔
엔디 워홀 세대만 해도 소위 말하는 ‘트렌드 세터’들이 모여드는 곳은 나이트클럽이었다. 그곳에서 유행에 대한 이런 저런 품평이 오갔고, 아티스틱한 아이디어가 뭉쳤다 흩어 졌다를 반복했다. 지난 세기의 나이트클럽이 수행했던 기능을 오늘날에는 호텔이 대신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기거나 상대를 중요하게 대할 때 만나는 장소를 호텔로 잡곤 한다. 그것도 더 이상 종을 딸랑거리며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맞선 장소로서의 호텔이 아니라, 트렌디의 최첨단이 호화로운 모터쇼마냥 펼쳐지는 공간으로서의 호텔로서 말이다. 이러한 계급적 허영을 십 보 양보하고 들어가더라도 그가 가지는 모순이란 시급 삼 천원의 쇼퍼가 최고급 송아지가죽의 빅 백을 내밀며 “아유, 고객님. 저희가 특별행사기간이라 정말 특별히 이백에 모시는 거에요. 품질 대비 너무 저렴한 거에요.”하는 것과 맞먹는 수준이다. 얼마 전 일 때문에 (남의 덕에) 머물게 된 서울의 한 6성 호텔은 계급으로서의 디자인이 가지는 모순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시내에서의 접근성을 뛰어나게 하기 위해 프론트를 파격적으로 줄이고 다른 층을 운행하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마련한 건 언뜻 보아 모던함을 추월해 버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효율성의 측면에서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할 요소였다. 또한 ‘누가 오더라도 최상의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는 호텔이 아니라, ‘선별된 이들에게만 어쩌면 편하고 어쩌면 불편할 분위기’의 호텔이란 건 6성이 최고가 아닌 위압이란 개념으로 대체되었나 하는 의심을 낳게 한다. 디자인의 기본은 뭐니뭐니해도 사용자를 고려하는 마음이다. ‘어때 멋지지’, ‘나 좀 잘났거든’하는 식의 거들먹거리는 디자인은 겸손이 배제된 반쪽자리다. 사회 안에, 디자인 자체에 계급으로서의 성격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 계급성이 본질을 잊게 만드는 극약으로 작용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필립 스탁(Philip Starck)이 최근 독일 주간신문 ‘Die Zeit’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 디자인은 모두 쓸데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데 치중한 결과일 뿐이며, 나는 그에 대해서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해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이 시대 최고의 산업디자이너라 칭송 받고, 최근까지도 중국 부호의 대형요트를 디자인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2년 안에 디자인을 그만 둘 것이며, 그보다 넓은 선상에서 ‘개념을 창조하는 프로듀서’로서 전업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 말하지만 기존 개념의 디자인은 죽었다. 나올 만큼 나왔고, 갈 때까지 갔다는 얘기다. 한 마디로 디자인이 과잉된 사회에서 더 이상 디자인을 논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거다. 세계는 점차 비물(질)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경계가 사라지고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자연스레 통합되어 가고 재창조되는 가치 또는 개념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개념의 디자인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흠,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디자인이 살아남을 유일한 창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