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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에 해당하는 글들

  1. 2008/06/29  중년 즈음에,
  2. 2008/06/27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3. 2008/06/26  클래식형 스펙트럼

중년 즈음에,

사족1.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해 중년이란 단어 자체가 아직 섹시한 지는 모르겠다. 물론 성숙한, 보다는 숙성된,이 더 잘 어울리는 나이가 언젠가는 좋아지겠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조지 클루니나 브래드 핏 모두 중년에 더 멋져졌다는 얘기는 들먹거릴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외쿡의 경우다. 모두 솔직해지자.)

 

사족2. ‘중년의 사전적 의미는 마흔 살 안팎의 나이. 다른 말로 하자면 청년과 노년의 중간지점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디까지나 과거의 기준에 의한 정의다.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100세까지 바라보는 것이 낯뜨겁게 되지 않은 이상, 마흔 안팎을 과연 중년이라 부르는 것이 맞는 지 모르겠다.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 사람이 동성보다는 이성에게 더욱 관대하다는 심리학적 근거를 뒤로하더라도.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는 단연 중년의 남성상이 연배의 여성상에 비해 찬란한 경우가 많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우리 머리 속에 각인된 이미지 또한 중년의 여성 하면 아줌마가 퍼뜩 하고 떠오르는 반면, 남성의 경우 아저씨신사가 동시에 떠오른다. 불공평한 처사지만, . 사실이다.

 

갈수록 결혼을 거부하는 골드미스가 늘어나고, 혼인인구 대비 출산율이 저하되면서 다시 한 번 여성과 가정에 대한 사회학적인 진단이 속속 출현하고 있다. 비단 직업과 결혼이 인류 최대의 딜레마는 아니지만, 적어도 동양문화권 내 존재하는 여성들에게는 벗어 던질 수 없는 짐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느 때보다 섹스 앤 더 시티에 등장하는 중년의 언니들이 써나가는 신()여성사가 머나먼 토스카나 지방의 사프란 리조또 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진다. 꿈나라 탐험은 두 시간 남짓, 극장에 불이 켜지면 띵동!’. 현실로의 회귀다, 안타깝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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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ound 40


전작 <여왕의 교실> <톱 캐스터>등을 통해 줄곧 강인한 직업여성 이미지를 구축해왔던 아마미 유키가 서른 아홉살의 정신과 의사 오가타 사토코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어라운드 40>. , 제목에서도 너무 잔인하게드러나듯이 마흔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전문직 여성이 겪는 사회적개인적 갈등을 그린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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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 식당

핀란드 헬싱키의 한 골목에 일식당을 차린 사치에(고바야시 사토미 분)는 장사가 되지 않아 한 달 넘게 고민을 거듭한다. 그러던 와중에 미도리(가타기리 하이리 분)와 마사코(모타이 마사코 분)가 우연히 식당에 모여들면서 여러 일들이 생긴다. 아름다운 핀란드의 자연과 소박하지만 임팩트있는 일본의 식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난 영화. 소프트한 버디무비로서도 손색이 없다.  









중대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두 작품을 보면서 느낀 건 그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는 풀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개중에는 풀리는 것도 있지만 말이다. 일과 결혼, 거기다 출산의 문제까지. 이 범주에 국한시키고 보면 서른에도 막막했던 문제들이 마흔이 되었다고 해서 초강력 파스마냥 시원스레 해결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들은 끙끙대고, 울거나 웃거나, 불행해하기도 행복해 하기도 한다. <어라운드 40>는 이 문제를 조금 더 현실에 가깝게 두고 본격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에게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결혼생활을 해 나가는 친구들이 있고, 아이가 있거나 없거나, 돈이 많거나 없거나, 모든 처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각자의 문제로 괴로워한다. 반면 <카모메 식당>은 조금 더 진화한(?) 삶의 형태를 보여준다. ‘일이냐 가정이냐의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 한 여성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선택한 이국에서의 삶 안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선택을 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지에 주목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는 그다지 우울하지 않은 모습으로, 아니 더 정직히 말해 유쾌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우정은 남자의 전유물만은 아닌 듯

 

<어라운드 40> <카모메 식당>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 한 가지는 세 명의 여성(친구)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욕망을 가지고 서로를 다독이면서도 때로는 시기하고 반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무적인 건 이 여성동맹이 꽤나 탄탄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페미니즘적인 수사를 달지 않더라도 그들은 동일한 정체성과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며 자신들의 여성성을 더 큰 조화를 위한 분모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남성들의 뜨겁고 끈적거리는 우정과는 또 다른 형태의 우정이 가능함을 어필한다. (영화 <카모메 식당>은 이를 넘어서서 여성공동체를 통해 일종의 유토피아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결국 중년?

 

이러나 저러나 결국은 중년의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 쌩쌩하기만 했던 몸뚱아리가 점차 노화되어 감을 진저리나게 느끼기 시작하는 나이. ‘젊은 것들이 이유 없이 얄밉게 느껴지는,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유년을 그리워하게 되는 나이. 일에서나 가정에서나 안정적인 위치에 놓여있지만 저마다의 구멍을 안고 사는 나이. 그래서 멋지기도 하고 서럽기도 한 나이. 그래서 위기가 될 수도 있는 나이. 이충걸이 경고했듯 젊음을 자만하려는 것이 아니다. 혹은 중년을 메인스트림의 가치로 어설프게 포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중년일수도 있고, 아직 아닐 수도 있고, 애저녁에 지났을 수도 있다. 그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온, 오지 않은, 혹은 지나버린 시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한번쯤 어떨까하고 턱을 괴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당신이 여성이라면 중년이 비단 풍요로 넘치는 마법의 옷장이 아닐 수도 있음을 가늠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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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위의 드라마와 영화 모두 출연하는 연기자가 바로 '카타기리 하이리'다. 워낙 강렬한 인상을 주는 배우라 <카모메 식당>에서 처음 접하고는 리서치를 무진장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후후) 그 이후 <어라운드 40>에서 여주인공의 연하남의 누나로 등장해, 범상치 않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참, 이유없이 호감가는 스타일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중독성 있는 캐릭터다. 주목해 보시길.






2008/06/29 15:59 2008/06/29 15:59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의 실체는 대부분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상이 빗나가 스스로 혼란을 야기했든, 상대와의 불신으로 인해 변수가 생성되었던 간에 말이다. 두려움은 철저히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 혹은 객체와의 관계설정에 달려있다. 그에 따라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인 두려움과는 약간 궤를 달리하는 두려움이 있다. 자신과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비치기까지 하는 존재(?)로부터의 공격. 그리고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개인. 그들의 반응. 그들의 이후의 문제’.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모든 것은 무방비다. 나이트 M. 샤말란의 신작 <해프닝>은 그렇게 모든 의문을 향해 관객을 무방비로노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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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개봉을 하자 마자 차선책으로 선택했던 이 영화를 앞에 두고 동행들에게 했던 질문은 단 하나. “무서워?”였다. 함께 한 영화학도 하나는 아냐. 심리극일꺼야.”라고 단호히 말했고, 그의 말에 현혹되었던 (나를 포함한) 다른 무리들은 설마하는 심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아니나 다를까, 초반부터 충격적인 장면들을 내뱉던 <해프닝>은 정말 제목 그대로 해프닝의 연속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려는 인상을 주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물론 샤말란의 여느 포스트 식스센스작품군과 비슷하게 말이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팝콘을 집어 던지는 관객들 사이로 들리는 외마디. “아이씨, 어쩌라고.” 적어도 당시에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말이다.   

 

에피소드 2.

학기 중 서울에 대한 향수를 앓다 무작정 씨네큐브를 향해 갔던 적이 있었다. 때마침 극장가를 들끓게 했던(비록 소규모였지만) 코엔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상영 중이었다. 앞 줄에 앉으신 뽕머리아주머니의 방해전략을 뚫고 한 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그 영화가 2/3 지점에 왔을 때, 이야기를 이끌어가던(적어도 그런 척을 했던) 주인공이 하고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 돌연사(!)에 관객으로서 두 가지의 두려움을 느꼈다. 믿고 의지했던 플롯의 축이 화자의 죽음으로 인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화자와 대적했던 안티-프로타고니스트의 존재가 무의미해짐에 대한 두려움. 어쨌든 관객으로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영화는 관객의 패닉을 방관하진 않았다.)

 

에피소드 3.

이번 주 필름 2.0’은 샤말란의 <해프닝>을 커버스토리로 다루고 있다. 다양한 평론가에 의해 여러 시각으로 같은 영화를 보게 한 이번 기획을 통해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평론에 따르면 미국 공포영화는 ‘9.11’을 전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고, 미국인들이 그를 통해 겪은 생생한 체험이 영화(특히 공포영화)를 통해 징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샤말란 감독 또한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해프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인간이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을 때, 바로 그 순간을 캡쳐해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이 가지는 충격의 강도와 곧바로 이어 생길 두려움 간의 상관관계. 충격-두려움 공식에 대한 가감 없는 기록인 셈이다. 물론 샤말란이 <해프닝>을 통해 미국이 겪어야 했던 테러에 대한 막연한 공포, 그리고 실제적 증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팠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영화에 보여지는 것처럼,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바로 우리의 눈 앞에서 펼쳐질 수 있음에 대한 가능성, 그리고 그 다음에 인간이 어떠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는 지에 대한 탐구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물론 앞의 에피소드에서 보여지듯, 공포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습관적인 기대심리는 음모가 밝혀지는 등의 사건해결의 면모일 것이다. 그러나 <해프닝>은 이러한 공포영화의 문법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낯선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는 보는 당시의 충격이상으로 보이지 않은 충격을 선사한다. 왜냐하면 쇼킹한 장면의 이면에 숨은 실체를 이성적으로 되짚어보고자 노력하지만, 그 상이 모호할 뿐 (이성적으로는) 그 어떤 논리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매우 감각적이다. 논리적 수사나 이성적 방어도 속수무책이다. 그저 감지할 뿐, 어떻게도 대처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오늘의 사회를 매우 닮았다. 혼란에 익숙해져 있고, 불분명한 명제에 둘러싸여 있는 현대인에게 너무나 친근하면서도 그렇기에 두려운바로 그런 속성이다. 그게 나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그러기에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거대하다.


2008/06/27 17:26 2008/06/27 17:26

클래식형 스펙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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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 필의 새 지휘자, 야닉 네제-세겐



넉넉잡고 클래식 음악(Classical Music)의 역사를 따져본다면 11세기 정도가 된다.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기원을 9세기부터라고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클래식이라는 장르 안에서도 워낙 역사와 문화를 걸쳐 다양한 층을 형성해 왔기 때문에 어떤 게 클래식이냐?’고 질문했을 때, 한 마디로 답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클래식 음악은 우리 사회에서 클래식이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지만, 실제 순수하게 언어 자체 만으로 두고 본다면 ‘Classic’‘Classical’ 간에는 어느 정도의 의미 차가 있다. 전자는 일류(작품) 혹은 고전 자체를 지칭하는 단어이며, 후자는 되려 그를 수식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기에 그 자체 만으로는 온전한 단어로 사용되기 힘들다.)

 

이런 클래식 음악계(이하 클래식 계)에서 십 수년 전부터 대두되었던 문제가 미래의 클래식이다. 이는 신문의 종말과 유사한 문제로 물론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 가야 한다는 내외부의 압력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메이저 레이블 사를 중심으로 하는 스타 마케팅과 POP이나 MTV등과 같은 대중적 장르 혹은 채널과의 제휴는 팔리는 클래식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관련 업계와 클래식 음악가들의 위기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펼쳐진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로테르담 필)의 내한 공연은 이러한 클래식 계의 변모하는 스펙트럼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예다. 랑랑과 더불어 지난 해에 이어 올해 다시 내한한 윤디 리(Yundi Li)와의 협연은 다분히 이벤트적인 면모가 돋보였고, 오는 8월 로테르담 필에 음악감독으로 정식 취임하는 젊은 지휘자 야닉 네제-세겐(Yannick Nezet-Seguin)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난 해, 윤디 리 공연에 대한 리뷰 링크)  

 

언론에서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된 적이 있지만 이미 유럽 음악계에서는 두스타보 두다멜(27),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36), 다니엘 하딩(33), 필리프 조르당(34) 등의 젊은 2,30대 지휘자들이 대거 등장한 데에 있어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오디오 만큼이나 비주얼이 중요해진 이상,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고(그들의 화려한 외모 혹은 에너제틱한 연주모습), 음악회 실황 뿐 아니라 다양한 DVD작업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무한한 영감과 가능성을 열어주는 젊은 연주자들의 등장이 반가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오히려 동양권에서보다 서양권에서 클래식이 젊은 층으로부터 외면 받고, 고리타분한 음악으로 간주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이와 같은 젊은 피(!)를 활용한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보인다.  

 

라벨의 ‘La Valse’를 시작으로 윤디 리와 함께한 프로코피에프의 ‘Piano Concerto No.2 in G minor op.16’, 그리고 마지막 작품으로 연주한 쇼스타코비치의 ‘Symphony No.5 in D minor, op.47’에 이르기까지 이번 로테르담 필의 프로그램은 다소 격정적이면서도 도전적인 인상을 안겨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차례도 흐트러지지 않고 온몸으로 지휘한(!) 네제-세겐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로테르담 필의 잠재성이 청각의 촉을 타고 흐르는 듯 했다. 불안한 정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드라마틱한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통해서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근현대로부터 그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음악적 여정의 신호탄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아니면 그 이상의 큰 그림이 숨어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의 리드미컬한 지휘봉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음악회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초반까지만 해도 네제-세겐의 진두지휘에 뚱했던 관중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의 4악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와 함께 연신 브라보를 외쳐댔다. 아직 앳된 모습이 가시지 않은 젊은 지휘자의 얼굴 뒤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열정의 무게와 이해의 연륜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젊은 것은 늘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지 않은 것보다는 좋은 것이 많다고 느껴지는 때다. 그렇기에 이 젊은 지휘자의 서른 넷이 염려스럽기 보단 이유 없이 두근거린다. (연합뉴스 공연관련 기사)   


2008/06/26 23:58 2008/06/26 2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