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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해당하는 글들

  1. 2009/07/03  페차쿠차 나이트
  2. 2009/06/23  강보라의 프랙탈 (4), (5) & (6)
  3. 2009/05/05  과학보다 예술!
  4. 2008/11/29  나비포럼 2008
  5. 2008/09/28  스승과 제자 (2)
  6. 2008/09/11  가치의 환산법 (1)
  7. 2008/05/18  습작과 작품

페차쿠차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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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하나! 오늘 오후 3시까지 예매이니 아직 시간은 남았다. 아트, 디자인, 건축, 영화와 관련된 기성작가와 신진작가가 한데 모여 20장의 이미지에 대해 20초간 이야기하는 장이 오늘 저녁 6시 광화문 역사박물과 옆 가든플레이스-루프에서 펼쳐진다. 전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페차쿠차 나이트는 예술을 아끼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장으로써, 경계를 허물고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장으로써 기능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참조> 페차쿠차 서울 l 페차쿠차 인터네셔널

2009/07/03 13:54 2009/07/03 13:54

강보라의 프랙탈 (4), (5)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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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재가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내부 사정으로 인해 4,5,6회분을 동시에 포스팅하게 된 점 이해 부탁 드립니다.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다 제 자식인데, 그래도 끝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어 뿌듯합니다. 다음 학기에도 새로운 연재로 인터넷 판이 아닌, 정식 지면에서도 만나볼 수 있기를 바라며.

강보라의 프랙탈 (4) 테크니컬 랑데부, 우위와 적합성  

강보라의 프랙탈 (5) 섞임에의 권유, 통섭

강보라의 프랙탈 (6) 직업예술에 대한 고찰, 2030년의 아티스트

Creative Commons License
강보라 에 의해 창작된 강보라의 프랙탈 (4), (5) & (6) 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06/23 17:02 2009/06/23 17:02

과학보다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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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 from flickr


매니지먼트에 예술적인 요소를 접목한 사례를 보여주는 동아비즈니스리뷰의 기사를 읽다가, 원본이 되는 HBR기사를 함께 찾아 읽었습니다. 예술경영이 국내에 소개된 지도 꽤 되었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는 부분은 (비단 이 분야만의 문제는 아니겠습니다만) 정통 fine art management 전공자가 각자의 영역에 계속 발을 담고 있으면서 서로의 영역에 관심을 갖거나, 일반 경영인이 예술의 한 부분을 차용하는 데서 쌓은 노하우, 또는 예술가가 자신의 팀/그룹을 꾸려가면서 기타 기업이나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 등이 어쩌면 오늘날 예술경영이라고 총칭하는 것들을 실질적으로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물론 예술경영자들은 무슨 소리냐,며 버럭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요.) 물론 중첩되는 부분들이 분명 존재하기에 예술을 위한 경영법이 생겨나는 것이겠지만, 세월이 좀 지나다 보니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이 짙어지네요. 융합, 학제간 협력, 통섭 등 뭐 듣기 좋은 말들은 많습니다만, 결국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해 만감이 교차하는 시점입니다. 덤으로 얼마 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에서 열린 통합적 학문과 관련된 자료도 함께 링크합니다.

2009/05/05 22:09 2009/05/05 22:09

나비포럼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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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 25일부터 10 30일까지 매주 목요일 SK 사옥 내 나비센터에서 진행된 <2008 나비포럼>의 프로그램과 동영상 클립 하나를 포스팅 한다. (해당 사이트 바로가기) 한국 세컨드라이프 본사인 ‘SERA KOREA’를 통해서도 이 포럼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미디어 아트와 파생분야에 10년 이상의 지원뿐 아니라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는 아트센터 나비(관장 노소영)의 결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다. 뒤늦게 미디어아트, 또는 다원예술 분야에 뛰어들고 있는 그룹들에게 가장 좋은 모델로 기능하리라 기대한다. (나비포럼관련 기사 하나 그리고 )

+비판적인 시각들도 물론 존재하고,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시각에 매우 동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OOO을 하고 있다는 행위 자체가 일단은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조금 더 다양한 담론들이 형성되고, 다양한 실험들이 추가되어 기존의 장들이 끊임없이 전복될 때 한층 풍성한 결과를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화여대 이인화 교수 발제_Virtual World: why, what, how

2008/11/29 10:04 2008/11/29 10:04

스승과 제자

통상적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로 이해되지만,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는 수평적인 관계, 나아가 쌍방향적인 관계일 때가 있다. 먼저 난 자로서 스승’, 나중 된 자로서 제자로 명명되었을 뿐이지, 말 그대로 청출어람을 몸소 보여주는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최근 수목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두 편의 드라마, MBC <베토벤 바이러스> SBS <바람의 화원>은 이와 같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특히 음악과 미술이라는 장르 안에서 벌어지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다른 분야의 그것보다 민감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다. 예술인의 특성 상 타인의 재능을 쉽게 감지할 수 있고, 반사적으로 그를 경계하게 된다.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운 무언가 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이 좁은 만큼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도 그 까닭이겠지만,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직업이기에 그를 위협하는 존재는 당연히 껄끄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 가 살리에르 증후군을 앓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 가운에서도 영감의 끈이 오고 가고 자신 이외에 가장 큰 라이벌과의 한판 승부도 기대해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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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 분)와 강건우(장근석 분)의 관계는 위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철저한 노력파로서 천재적 기질을 보였던 평생 라이벌에게 뒤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굳히는 강마에에게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뛰어난 연주실력을 보여주는 강건우의 존재는 살아있는 트라우마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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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에서의 김홍도(박신양 분)와 신윤복(문근영 분)의 대결구도도 유사하다. 픽션이 많이 가미되었지만 동시대를 풍미한 두 화원의 엇갈리는 운명이 스승과 제자, 남자와 여자, 인정받은 예술가와 그렇지 못한 예술가로 대비된다. 신윤복의 당돌함에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김홍도는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두 드라마는 서양의 음악과 동양의 미술이라는 어찌보면 판이하게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를 관통하는 천재와 천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강마에나 김홍도 모두 자신의 재능을 둘러싼 상처를 간직하고 있고, 현재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방어책을 고수한다. 그래서인지 공통적으로 괴팍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에 반해 그들의 제자들은 자신이 보고 느끼는 대로 솔직히 표현하고 지칠 줄 모르는 순수한 열정을 보여준다. 그것이 때때로 (상대적으로) 늙은 스승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숨 조임으로 다가오는 지 모르고 말이다.

언젠가 들었던 일화가 있다. 현재 국내에서 최고의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는 자신의 제자에게 절대 ‘100%’를 전수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뭐 그리 쪼잔한 이가 다 있나 했지만, 동종분야의 이들은 이를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치열한 밥 그릇 싸움에서 밀려나기란 시간문제라는 이유였다. 뭐 사정이야 제 각각이겠지만, 조금 더 훈훈한 분위기 안에서의 교감이 오간다면 좋을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예전에 감탄했었던 한 연주를 소개하고자 한다. 재미교포 재즈 색소폰주자로 떠오르고 있는 그레이스 켈리(16)가 기타리스트 대가 러셀 멜론과 함께 한 연주실황을 포스팅한다. 그녀에 관한 최근 기사도 여기에 같이 올린다.

2008/09/28 17:34 2008/09/28 17:34

가치의 환산법

151.70km, 240, 132,000.

어제 저녁 유성에서 출발해 서초 예술의 전당에 도달하기까지 지불해야 했던 물질적 및 비물질적 가치다.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정명훈, 랑랑이 합세한 어제 콘서트 홀에서의 연주는 대형 기획 공연답게 거의 만석에 가까운 흥행 결과를 낳았다. 추석 전야라 그런지 시 외곽이고 내부이고 할 것 없이 정체가 빚어지지 않는 도로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 까닭 때문인지 늦은 관객도 꽤나 많았다고 한다. 무려 30분이나 늦어 결국 1부 앵콜만 겨우 엿들을 수 있었던 나로서는 애꿎은 외부상황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더 치밀하게 움직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더 컸지만서도.

 

빨간 후미등 불빛 사이로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쯤, 자문했었다. 과연 가치를 환산하는 법은 상대적인가 하고. 특히 정서적/감정적 가치일수록 그를 환산하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무슨 문화적 사치를 떨려고 이 고생을 사서 하나 싶은 마음에 스스로가 우습게 보이기도 했고, 중간 지점에서 그냥 돌아가버릴까 싶은 충동에도 사로잡혔다. 부은 다리를 주물러가며 올라가던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 홀 사이의 계단은 왜 그리도 높게만 보였는지. 좋은 공연을 향유하고자 하는 기대감과 궁상맞기 짝이 없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빼다 박은 것만 같아 순간 징그러웠다.


그래도 참 기막힐 노릇이었다. 부리나케 달려들어간 공연장 한 켠에 서서 어둠을 휘감는 쇼팽 에튀드 Op. 10-3(앵콜곡)을 들으니 누적되었던 피로와 씩씩거렸던 숨 모두 언제 그랬냐는 잠잠해졌다. ‘이별이라는 애칭으로도 잘 알려진 이 곡의 잔잔한 도입부가 무언가를 보상받고자 했던 마음의 빚더미를 잦아들게끔 했다. 몇 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서 있던 두 귓가에 151.70km, 240, 그리고 132,000원을 거뜬히 능가하는 가치가 안착되었다. 차려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손, 오랜 기다림 끝에 고백하는 입술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비단 물리적인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쁜 일상이 꼭 좋아하지만은 않는 일들을 하고, 예의 없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것만으로 채워진다는 게 버겹게 느껴지곤 한다. 하루 하루를 수면으로 매듭짓는 것도 간당간당할 노릇인데, 거기다 무슨 취미나 여가생활이라는 게 사치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도 다분히 우리 안에 내재된 감정기제를 세심하게 닦아줄 필요가 있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꽤나 요망한 것이라 꾸준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세정제 값이 너무 많이 든다고 불평하지 말자. 쓰라고 있는 게 돈이고, 보내라고 있는 게 시간이요, 즐기라고 있는 것이 삶이니. 때때로 가치는 내 맘대로환산되는 법이다.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선포한 새로운 수목미니시리즈 <베토벤 바이러스>가 시작되었다. 내 클라리렛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순재에게 오보에를 가르치느라고 담당 오보이스트가 꽤나 고생했다고 한다. 하긴 이순재도 참 대단하단 생각을 한다. (존경) 오케스트라 엑스트라로 분한 다른 사람들도 김명민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했다고 하니, 역시! , 강마에! 강마에! 장근석의 앞날에 대한 걱정(그의 나르시즘)도 잠시 접어두고, 소녀의 마음으로 감상해 주련다. <노다메 칸타빌레>와 여러모로 비교되겠지만, 이 정도 출발이면 주눅들 필요 전혀 없단 생각이다. 김종학 프로덕션의 새 야심작, 한국드라마의 앞날이 밝다.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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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1 16:58 2008/09/11 16:58

습작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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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0


 

습작과 (완성된) 작품 간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고들 한다.)
물론 '차이'야 알지만, 그래도 그건 정말 야속하리만큼 사소한 것이라 우기고 싶다.
완성된 두 장의 시화를 위해 이것저것 테스트해 본 종이의 모습이다.
뜻도 없고 구도도 없고 조화라던가 구상이라던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난 이 '연습종이'가 좋다. 그리고 연습을 우리는 다른 말로 습작이라 부른다.
연습은 물론 완결점을 향해 가기보단 중간과정에 머물러 있기를 즐긴다.
굳이 마침표를 찍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어쩌면) 더 자유롭다.
그러나 '작품'의 영역으로 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메시지던 이미지던 아니면 분위기건 개성이건 어쨌든 끝마쳐야 한다.
이야기가 시작해서 어디론가 빠져나올 구멍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걸 연습 혹은 습작이라 부른다.
그러나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습작에 애정을 가진다.
무흠한 것은 정감이 없달까, 심지어 밉살맞아 보일 때도 있다.
매끌매끌한 최고급 소가죽보다는 빛바랜 한성피혁에 더 정감이 가듯이.
웃기는 이야기지만 이건 순전히 정감의 문제, 교감의 문제이다.
잘 빠진 작품이 보기에는, 팔기에는 좋을 지 모르겠으나
왠지 사생아 같은 습작에게 따스한 손길이 더 가는 건 마음의 이치이다.
예술의 길도, 삶의 여정도 습작을 더 닮았기에, 그 미숙함에 조금 더 다가가 있기에
작품보다는 습작이란 말에 더 그렁그렁한 눈을 가지게 된다.
아하하. 실로 우습지만 산다는 게 그렇다.  
2008/05/18 22:04 2008/05/18 2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