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어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hamartia는 ‘과녁을 벗어나다’는 뜻으로 오늘날 통용되는 죄의 뜻과는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백과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현대적 의미에서의 죄란 ‘국가나 사회 ·교단(敎團)과 같은 집단이 규범(規範)으로서 인정하는 법칙에 어긋나고 그것의 결과로서, 규범을 위반한 사람에게
벌을 가하게 되는 행위나 태도의 일반적 명칭’을 뜻한다. 국가와
같은 사회적 집단의 단위가 정착되고, 그 안에서의 일련의 규칙들이 공익과 공영을 위한 최우선순위로 등극하기
시작하면서, 정죄 또는 단죄와 같은 행위들이 자연스레 나타났다.
누구나 한 번쯤은 발칙하게 상상해 봄직한 일은, 대체 누가 누구의 죄를 판단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중등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냐’는 비아냥과
함께, 사회 최고의 규범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쯤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최고의 선을 보장한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내밀하고도 주요한 부분이 의학과 법학일진데, 그
두 분야 가운데서 완전한 인간의 행위가 가능하기는 하단 말인가. 무조건적으로 그 반대방향을 따라, 모든 것을 와해시키자는 극단적인 주장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온전한 속성으로 인한 ‘사각지대’를 어떻게 풀어나갈
건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되어야 한다.
존 크리울리 감독의 2007년작 <보이 A>는 어린 시절 우발적인 살인사건으로 가해자로
낙인 찍힌 한 소년이 성장하여 재사회화를 겪는 여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실제 영국의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남자주인공의 탁월한 연기와 연출로 크게 인정받은 작품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그 어느 편도 들지 않은 채, 공정한 시선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한 번의 죄로(영화는 주인공이 직접 범행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 있었을 뿐이라는 암시를 던진다) 호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주인공이 성장한 후 사회에 첫발을 내 딛고, 끊임없는 자기의심에서부터 벗어나려는 과정은 참으로 눈물겹다. 어느덧 사회 안의 구성원으로 어엿한 모습을 꾸며가던 그에게 ‘주홍글씨의
악령’이 되살아나고, 그의 곁에 머물던 이들은 금새 그에게
등을 돌린다. 가족과 친구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악마’로 호명되며 살아가는 그에게 더 이상 갈 곳은 없는 것인가. ‘보이 A’라는 가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눈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악몽에서
벗어나려 했던 스물 중반의 청년에게,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죄’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인식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개념은 허공에 떠도는 추상적인 무언가가 아닌,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죄인’을
만들어내는데 탁월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변모해왔다. 주홍글씨, 마녀사냥, 매카시즘 등. 모든 것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죄의 기준’이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칼날이다. 죄란 논리에 의해 삶과 죽음, 때로는 더한 고통도 더해진다. 그러나 본질을 꿰뚫는다면 그 어떤 것도 죄로 완벽히 설명할 수 없으며, 죄로
무언가를 교화시키거나 공포심을 조장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허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깝게 알고 있다는 이와 순간 연락이 끊어진 적이 있는가. 그(녀)의 주소, 이메일, 핸드폰 번호,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장소 등등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갑자기 연락이 닿지 않아 전전긍긍하는가. 행방의 여부는 둘째치고,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지는 않는가. 오해와
착각은 (적어도 지구라는 행성 내에서는) 고도의 지능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인간 고유의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동시에 이는 인간의 이성이 비단 발전적인 방향으로만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은 ‘내가 보고 있는 것 이외에는 못 본다’라는 뜻이 된다. 같은 논리로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알지 못한다’는 게 된다. 결국 ‘본다’에서 파생된 착각과 ‘안다’에서
파생된 오해가 빚는 파급효과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우리는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위의 에피소드는 이와 같은 ‘인지와 이해의 양면성’을(또는 그 허수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그러니 결론은 “인간이여, 오만해 지지 말라”! 실제 당신은 그 무엇도,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을 지도 모른다.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는 한 가족의 파멸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파멸’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들(어머니의 죽음이나 아들의 죽음 등)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아들은 자신이 모든 상황을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아들은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기고, 한 아내는 자신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현실, 믿고자 하는 사실에만 근거해 작은 사건을
계획하지만, 그 사건은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수많은 변수가
등장하고, 모두가 코너에 몰리고, 적잖이 당황하고,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친다. 그리고 이 모든 잔혹한 결말의 근원은
‘나는 다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기정사실화되어버린, 신화화 되어버린, 무시무시한 ‘가정’에서부터.
그러니 ‘적어도 내 상황만큼은, 나
자신만큼은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마라. 문제는 무흠무결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100프로 세이프’하다고 여기는 순간
어긋나기 시작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그게 세상의 이치’다. 그렇다고 벌벌 길 것 까지는 없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 만사에 오만한 일, 나는 예외일 거라는 안일한 생각에서부터 의식적으로 벗어나야만 한다. 그것만이
예측할 수 없는 사건사고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최소한의 기제다.
p.s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살을 뺄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 자신감에 반한 팬들이 많으니, 굳이 과감한 체중감량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연기 하나는 끝내주니깐, 투실한
살집도 내공의 펌프가 된다. 왕년의 꽃미남 에단 호크가 몰라보게 살이 빠진 것은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성격의 ‘행크’역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가여운 외모를 가질 법도 하다. 연기? 뭐, 거의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생긴 배우는 연기가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통설도 다 옛말이다. 팔방미인이 판 치는 세상이다. ‘지니’역의 마리사 토메이는 얼마 전 <더 레슬러>에서도 ‘몸’으로
열연하더니, 이번 영화에서도 육탄전을 마다치 않는다. 64년생이라는
걸 감안하면, 경의에 찬 박수를 보낸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그’의
이야기다. 고로 ‘그’의
이야기들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 ‘history’는 그렇게 거창한 개념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사사로이 넘길 수 없는 무언가 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누군가
일수도 아무도 아닐 수도 있는 그의 이야기. 그게 힘을 받는 순간은 바로 개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로 중첩될 때이다.
랜디_더 레슬러
퇴역을 앞둔 레슬러 랜디는 본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을 ‘랜디’라고 불러주길 원했다. 로빈이라는 평범한 이름보다는 ‘레슬러 랜디’가 자신을 더 잘 표현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랜디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와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자신을 일치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결국은 그를 위해 링 위에서 죽음까지 고사한다. I see what you
don’t see. 최근 길을 가다 우연히 본 문구가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랜디의
삶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환호성과 남들이 보지 못하는 환영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바로 링 위에서 펼쳐졌다. 비록 그가 실패한 삶의 주인공이고, 목숨이
내일모레하는 상황에 처해있지만, 그는 바로 ‘순간’에 전적으로 살아있고, 전적으로 ‘히어로’다.
자말_슬럼독 밀리어네어
대니 보일이 신작으로 눈길을 끌고 있는 이 영화는 자칫 ‘시티 오브
갓’을 떠올리게 한다. 이국적인 정취와 빈민가에 버려진 아이들, 그들의 기구한 운명. 혹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자말의 이야기가
식상하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하듯 열린 결말이나 비극에도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다. 영화를 통해 ‘자말 말리끄’라는 이름은 수십 번도 더 호명된 것 같다. 포기하지 않는 사나이. 평범한 성질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절대적으로 비범한 삶을 산 뭄바이 출신의 청년. 그의 인생에 대한
퀴즈의 정답은 그의 삶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였다. 그러나
결국 그 ‘예정된 삶’을 살아낸 것은 온전히 자말의 몫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일. 우리는 그렇게 매일 그가
아니면,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시간들을 묵묵히, 또는 멋지게
이겨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루디_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파니 핑크’ 이후에 다시
접하는 도리스 되리 감독의 근작에는 개인적으로 낯익은 도시들이 등장한다. 바이에른의 알고이, 베를린, 그리고 도쿄. 그리고
또 독일어. 독일 가곡을 들을 때나 독일 시를 읽을 때 느끼는 것이지만, 독일어는 모든 언어가 그렇듯 고유의 색채를 가지고 가장 적절한 장르에 빨려 들어가는 맛이 있다. 비록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나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이 조금 불편한 감이 있지만. (쩜쩜쩜) 그래도 독일감독이 이 정도로 동양적인 감성을 가미해 연출을 선보였다는 것이 놀랍다. 죽음과 그 이후의 남겨진 이들의 삶에 대해선 많은 영화들이 많은 이야기를 해왔지만,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또 새롭다.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 남자와 여자, 파리와 손수건은 어쩌면 너무나 다르지만 알고 보면
가까이, 같은 존재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라고.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정말 지구종말이 가까워진 게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에 잠겨있다거나, (솔직히 그렇게 엉뚱한 것 같지도
않다. 지구의 ‘막장 드라마’가 여기저기서 펼쳐지니깐) 억울하게 진 WBC 결승전에 분함을 미처 떨쳐버리지 못했다면, 추운 겨울 혀 끝
뿌리까지 덥혀주는 어묵국물과도 같은 이 영화들을 목구멍으로 스르륵 넘겨보자. 쿨해서 징그러운 세상사에
핫(!)하게 좀 찡해보자.
처음엔 두근거렸다가, 조금 있으니 ‘설마설마’하다가, 은근슬쩍 화가 나다가, 점점 민망해졌고, 결국은 포기했다. (이게 내 인생 가장 짧은 리뷰로 남길 바란다.)
+정지우 감독은 <해피엔드>,<사랑니>때 보통이 아니다, 남성감독이 어떻게 이렇게 심리묘사가 내밀할까, 감탄에 감탄을 연속했던 이었는데. 봄부터 나온다 만다 말도 많고 기대도 많았던 작품이었는데. 어찌된 사정인지 뒤늦게 개봉을 했고, 후반작업에서 시간이 지체되어 재(통)편집을 스무 번쯤은 한듯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도 좋으면 그만인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거다. 시나리오 자체서부터 인물의 심리적 변화에 따른 근거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동시에 인물설정과 사건전개간의 개연성 또한 빈약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근본적인 의심을 낳게 했다. (아, 속상해) 얼마나 좋은 조건인가. 최고의 남녀배우와 최고의 배급사와 최고의 세트(그리고 CG)가 가세했는데, 결과물이 이토록 초라하다니. 아이에게 땡 빚을 내어 최고급 과외를 시켰는데, 일년 후에도 성적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라는 가정과 비슷하려나. 역시 영화를 한다는 것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과 똑 같은 가보다. 정 감독님, 많이 속상하시겠지만-팬 이’었’던 저는 더 속상해욧ㅠ
캬. 제목하고는. (속된
말로) 아구가 이렇게 딱딱 맞는 영화를 보면 보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막판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장훈 감독의 <영화는 영화다>는 추석 연휴 내내 조용한 흥행성적을 내면서도
농도 있는 짜임새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대략적인 플롯을 알고 갔던 터라, ‘이게 과연 이야기가 될까’란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타고난 이야기꾼의 하드보일드는 빠른 후크에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김기덕의 내공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소.간.지
우려했던 강지환의 연기는 생각보다는 나았다. 특히 정적인 씬에서는
그의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났지만, 되려 감정을 휘몰아치면서 들어가는 부분에서는 놀라울 만큼 노련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8할은 소지섭(이
영화 이후로는 소간지) 이 끌고 간다고 봐도 된다. 혹자는
소간지의 우수에 젖은 눈빛과 몸의 디테일이 ‘얼치기 스타의 후까시’와
어슷하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또는 소지섭의 연기는 ‘발리에서
생긴 일’, ‘미안하다 사랑한다’로 이어지면서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고 평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지섭의 경우에는 그 간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쭉- ‘그 안에 갇힌다 해도’ 좋겠단 생각이 든다. 간지도 아무나 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놈놈놈’에서 정우성이 보여준 수려한 카우보이놀이나 이 영화에서의 소지섭의 ‘간지
나게 담배 피우기’ 등은 후천적인 반복학습에도 기인하겠지만, 그보다는
타고난 ‘간지성’이 내재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즉, 그들의 기럭지는 덤이고, 기본기는
존재감이란 거다. 거기서 ‘간지의 정점’이 찍히는 거다. (주변의 한 친구는 소간지 때문에 영화를 두 번이나
봤다고 하니, 말 다했다. ‘놈놈놈’때도 말했던 거지만, 간지나는 것도 능력이다.)
영화와 폭력
엄연히 감독 난에 장훈이라는 두 글자를 보면서도 넓게 드리워진 김기덕의 그림자를 거두어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시나리오를 탑처럼 쌓아두고 아래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빼서 영화를 찍는 다는 통설처럼, 그는 응어리진 이야기 더미를 끌어내듯 후두두둑 뱉어낸다. 외람된
비교인지는 모르지만, 김기덕을 보면서 문득 김아타가 떠올랐다. 둘
다 내게는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사람들이지만, 번뜩이는 재능을 지닌,
범상치 않은 이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그 누구보다 철학적이고 변칙적이면서도
동양적인(나는 가장 동양적인 감독과 사진작가로 이 둘을 꼽겠다. 엄한
국악인을 갖다 붙이는 건 너무 일차원적이지 않은가.) 이 둘은 아마도 그렇기에 우리보다는 서양권에서
환영 받나 보다.
각설하고 김기덕은 영화에서 ‘영화와 폭력’이라는 상관없어 보이는 두 주제를 잘 배합하고 있다. 연기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있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하다가 영화 속 폭력을 현실에서의 폭력으로 치환시켰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에 대해 리얼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둘 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 바깥 어디선가 유유자적하게
현실을 조소하는 듯한 분위기가 묘하게 다가온다. 잘 나가는 영화배우나 깡패나 삶이 진짜 같으면서도 가짜
같은 것은 비슷한 거 아니냐고 어르기도 한다. 결국 김기덕이 말하고 싶었던 건 영화의 의미와 그 안에
담기고자 하는 진정성에 대한 재고가 아닐까 한다. 현실을 대변하는 요소로서의 폭력은 오히려 더 영화적이다. 곧 죽어도 ‘연기’가
생명인 배우의 눈 앞에서 실제 사람을 죽이는 깡패의 액션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한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영화’가 있느냐고, 감독은 자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자체도 영화의 일부분이다. 영화 속에 영화가 있고, 또 그 안에 인물들에 내재된 각각의 영화(세계)가 있는 꼴이다.
여전히 남겨진 숙제
물론 김기덕이 여성을 배치시키는 문제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극중 홍수현이 소지섭에게 다가가고 마음을 여는 부분은 생략된 서사가 많다. 주변인물들의 행동에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치기가 부족했고, 설명을 위한 컷이라고는 하지만 군더더기같이 느껴졌던 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소소하게 빛을 발하고 있어 기특하다. 아니, 멋지다.
미국의 블록버스터가 변하고 있다고 예견된 건, <다크 나이트> 개봉 훨씬 전부터의 일이었다. 심플하기 짝이 없는 ‘권선징악’의 거대명제 아래 볼거리만 풍성하면 빈약한 서사도 다 덮어주겠다던 것이 미 블록버스터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등으로 이어지는 코믹북 영웅 계보에도 이와 같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쳐 ‘영웅 서사의 진화’가 이상 징후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각각 ‘영웅’으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변종’이 된 계기는 각기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람의 힘으로(법, 치안, 공권력 등등)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공동체의 안녕을 21세기적 켄타우루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에게 일임하는 식의 극 설정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스파이더맨 3>에서 보여진 바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추앙 받았던 ‘영웅’은 더 이상 절대 선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자신이 지키고자 노력해 왔던 가치들과 절대 선의 문제에 대해 반문한다. 원론적이지만,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절대 선은 존재할 수 있는가’하고.
<다크 나이트>는 여러모로 기대가 많았던 작품이었다. 故 히스 레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면에서나 영원한 조각남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새로운 배트맨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기대심리에서나 <다크 나이트>의 개봉을 앞두고 밤잠 설칠 이유는 꽤나 많아 보였다. 대형 포털의 거의 만점에 가까운 별점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크 나이트>에 대해서 약간은 염려스러운 시각을 던져볼까 한다. 누구나 이미 백만번쯤은 이야기했든, 조커 역의 히스 레저는 ‘살아있는 조커’의 모습을 완벽 그 이상으로 재현해 내었고, 외모로 차가운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크리스찬 베일은 배트맨 중 최고였다고까지는 못할 망정 2등 정도는 되었다. (사담이지만, 그의 최고작은 뭐니뭐니해도 <아메리칸 싸이코>가 아닐까.) 배트맨의 연구소는 돈 냄새를 하도 풍겨 관객의 후각이 마비될 정도였고, 건물 몇 개, 도시 하나 쯤은 뻥뻥하고 초토화시키는 영상은 블록버스터 상위권 안에는 안정적으로 안착할 듯 보였다.
그러나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가면 쓴 영웅을 필요로 하는가. 더 디테일하게 질문하자면, 우리는 고민하는 가면 쓴 영웅을 필요로 하는가. 대답은, 글쎄요,다. 예를 들어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시스템의 최고 선에 대해 도전하는 류와 ‘배트맨’은 시작점부터가 다르다. ‘본’의 고민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배트맨’의 고민은 글쎄. 후작을 만들어 내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는 듯 하다. 세계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홉스가 장담했던 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구도로 나아가는 가운데 ‘배트맨’과 같은 초월적 수호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했을 법하다. 그러나 그 고민은 제작자와 감독의 것이지, 그를 직접적으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서사를 통해 드러났어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조커가 왜 끊임없이 살상을 저지르고 파괴를 일삼는지에 대한 이유는 전혀 설명해 주지 않으면서 배트맨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선의 개념’에 대해서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악’의 개념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그의 절대성을 인정해주는 대신 ‘선’의 개념은 ‘선한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악을 낳으면 그것도 선인가’하는 식의 사고로 상대적으로 추락시키는 느낌을 준다. (그렇게 허술한 논리로 ‘배트맨’이 됐을 거면, 애초부터 만들어내지 말지 그랬냐는 비판도 종종 들린다.)
‘슈퍼맨’, ‘스파이더 맨’과 더불어 ‘배트맨’에서 공통적으로 관객이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바로 초인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담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는 조커가 지적하는 바대로 ‘너 같은 변종은 나와 같은 존재야’라고 반격당하기에 좋은 부분이기도 하다. 즉, 영웅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를 추종하며 그의 보호 아래 있었던 다수의 사람들은 요동하기 시작한다. 그의 존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있어야만 완전해질 수 있는 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OO맨’하는 류의 미국 영웅이 철저히 인간의 시점으로 돌아와 ‘선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라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모습이 (이해는 십분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언젠가 정치철학 세미나 때 ‘정당한 전쟁은 있는가’란 질문을 던졌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선이든 악이든 하나의 행위로 인해 파생하는 결과는 늘 양면적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선 다면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는 (모순이지만) 선택적이면서도 비선택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말인 즉, 그가 예측가능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왜 배트맨은 조커를 죽이지 못하는가. 죽이지 못하는 것이 절대 선인가. 아니면 절대 악으로 상징되는 그를 제거하는 것이 절대 선인가.’라는 질문)
고민하는 영웅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영웅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은 달달하면서도 쌉쌀하다. 영웅을 섣불리 ‘짬짜면’면으로 만들게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냥 단순명료했던 옛날의 촌스런 영웅이 그립다. (사는 것도 복잡해 죽겠는데, 왜 영웅까지 복잡하고 난리야!)
난 알고 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Mir ist bewusst, was Freiheit bedeutet.
오기가미 나오코의 두 번째 영화 <안경>은 중반부쯤 한 인물의 입을 통해 자유에 대한 꽤나 그럴싸한 몇 마디를 읊조린다. (그것도 독일어로) 남자의 독백이 흐르는 가운데 에메랄드 빛으로 가득한 바다와 바닷물의 끄트머리에 잔잔히 부서지는 하얀 파도, 그리고 그와 눈부신 띠를 만드는 고운 모래. 해변가에 한가로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인물들 위로 카메라는 유영하고, 남자는 말한다. 난 알고 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난 알고 있다…고.
자유박탈 + 여유결핍
참 이상할 노릇이다. 오늘의 우리는(적어도 내전이 일어나는 지구촌 몇몇을 제외하고서는) 자유가 박탈된 적이 없었다. 외형적으로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자유가 있었는지도 까마득하고, 아니면 원래 자유라는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중에 홀연히 사라진 건지 가물가물하다. 여유라는 녀석도 마찬가지다. (같은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는 ‘레저’라는 이름으로 여유를 포장하고, 보기 좋게 진열하여 ‘얼마에 드릴 테니 이번 기회 놓치지 마세요’하면서 끊임없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참 우스운 일이지만, 무형적인 뭔가를 판다는 것은 사천만의 ‘봉이 김선달’을 복제해낸 것과 맞먹는 충격을 주곤 한다. (아니 어떻게 내 인생을 ‘네’가 책임지며, 아니 어떻게 내 행복을 ‘네’가 파는 것인가.) 어떤 가치가 포화된 상태는 그것이 부재할 때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일까. 곁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비가시적인 무언가를 찾아서 떠난다는 게 무슨 소용이며, 그게 찾아진다고 찾아지는 것일까. 이내 자포자기하며 자리에 누워버린다. 에라이, 모르겠다. 알게 뭐람. 그깟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어쩔 줄 몰라,요
너나 할 것 없이 흔히 발견되는 현대인의 증상은 바로 ‘어쩔 줄 몰라,요’(병)이다. 처음 만난 이들끼리는 물론이거니와 수 십 년을 맞대고 살아온 가족 간에도 밥상을 마주할 무렵 ‘어쩔 줄 몰라’하는 경우가 적잖다. 젓가락질 몇 번에 먼산은 열 댓 번 쳐다보는 식이라면 설명이 쉬우려나. 대화의 부재, 소통의 부재가 문제라지만, 정작 더 문제는 ‘어쩔 줄 몰라’(병)이 심각해져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순도 100퍼센트의 ‘사족(蛇足)’이다. 한 마디로 필요 없는데도 막무가내로 껴주는 ‘특별사은품’같은 존재라는 거다. 자,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하루에 꼭 필요한 말은 과연 몇 개나 될까. 나는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가. 관심이 있어서인가, 진심이었나, 그냥 무뚝뚝한 순간을 대체해보려는 수단이었나, 팔을 비비 꼬는 민망함을 모면하기 위한 술수였나. 그 많은 말을 왜 했을까. 그 많은 행동을 왜 했을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알고 보면은. 흠. 결국 어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심각하다.
사색에 대한 면죄부
영화 속 한적한 하마다 여관을 찾은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 분) 또한 처음 섬마을 사람들의 ‘사색’에 적잖이 당황한다. 사색이라, 사색이라니. 애초에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지구 같은 거 없어져버렸으면’ 했던 그녀의 마음도 하마다 여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저 ‘휴대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으로 떠나고팠다는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낯섦, 그 자체였다. 상상컨대 그녀 또한 (우리처럼) 쉴새 없이 진동이 울려대고, 하루에도 수십 건의 스팸 메일을 삭제하고, 필요하건 불필요하건 사람들과 부딪히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무언가를 구입하고. 소비의 연속 가운데 정작 가장 빨리 소모되는 것은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 채, 모든 것을 대도시의 리듬에 맡겨버렸으리라. 그런 생활을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반복하면서 갑작스레 맞이한 휴식 가운데 주어진 시간이라니! 무릎이 한껏 튀어나온 트레이닝 복을 입고, 집 앞 슈퍼에서 첫사랑과 우연히 조우했을 때보다 백만 배쯤 더 어쩔 줄 몰랐으리라. 그렇게 당황한 그녀를 하마다 여관은, 영화는 보채지 않고 느긋이 기다려준다. 그녀가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관객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그래서 ‘사색’이 하릴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잉여활동의 일부로 폄하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뭐라던 간에 존재가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는 한 뼘 남짓한 시공간을 선사하는 둘도 없는 선물임을 깨우친다. 그렇게 <안경>은 ‘사색’이 담배 한 가치 물면 자동으로 ‘뿅’하고 나타나는 게 아님을, ‘여유’가 홈쇼핑 채널의 패키지 상품으로 구입할 수 없는 것임을 찬찬히 훑어준다.
느리게 걷기
정작 동명의 까페에 가면 그다지 ‘느리게 걷는다’는 느낌이 나질 않는다. 소비가 소비를 소비하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찾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대신 이것을 상상해 보라. (영화에서 힌트를 얻었으니, 영화를 일단 보(시)는 게 도움이 될 듯.) 일체의 기기를 버리고 적막가운데 처하라. 그곳이 자연과 근접해 있는 곳일수록 좋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잠시 어딘가로 치워둬라. 필요한 건 자신의 몸뚱이와 정신, 그거면 족하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정하라. (처음엔 여기저기로 시선이 쏠리겠지만) 한 군데를 응시하고 마냥 고정하라. 그리고 지겨워질 때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라. 그 가운데 누군가를 떠올린다 던지, 지나간 사건과 시간을 되짚어본다 던지, 일어날 일 혹은 하고자 하는 일을 상상해 보는 것도, 아니면 영 엉뚱한 무언가에 대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사라졌던 감각이 되살아날 것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될 것이다. 매일 먹는 밥알에도 색깔이 있고, 향취가 있으며, 고유의 맛은 물론이거니와 일종의 여운까지 남김이 새삼스레 느껴질 것이다. 주변의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지럽게 정신을 수 놓았던 망상들이 하루아침에 말끔히 정리되었음에 안도할 것이다.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이렇게, 별 게 아니다. 그리고 ‘별 게 아니라’고 여기는 만큼 하찮게 치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대로 시류에 동승하지 않는다는 인상에 ‘나만 뒤쳐지고 있다’는 불안감을 주조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는 ‘느리게 걷기’를 거부해왔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함을, 더 늦기 전에 알아채야(만) 한다.
영화 <안경>을 보면서 ‘주말농장에나 가봐야겠군’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삶에 대한 조망이라는 것은 인위적인 요소들을 한 곳에 진열해 놓는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숨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찾아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하루가 걸릴지, 평생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아련하기에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자, 준비 되었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안경’을 벗고, 나만의 ‘안경’을 찾아 떠나보자.
사족1.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해 ‘중년’이란 단어 자체가 아직 섹시한 지는 모르겠다. 물론 성숙한, 보다는 숙성된,이 더 잘 어울리는 나이가 언젠가는 좋아지겠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조지 클루니나 브래드 핏 모두 중년에 더 멋져졌다는 얘기는 들먹거릴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외쿡’의 경우다. 모두 솔직해지자.)
사족2. ‘중년’의 사전적 의미는 ‘마흔 살 안팎의 나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청년과 노년의 중간지점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디까지나 ‘과거의 기준’에 의한 정의다.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100세까지 바라보는 것이 낯뜨겁게 되지 않은 이상, 마흔 안팎을 과연 중년이라 부르는 것이 맞는 지 모르겠다.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자. 사람이 동성보다는 이성에게 더욱 관대하다는 심리학적 근거를 뒤로하더라도.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는 단연 중년의 남성상이 연배의 여성상에 비해 찬란한 경우가 많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우리 머리 속에 각인된 이미지 또한 중년의 여성 하면 ‘아줌마’가 퍼뜩 하고 떠오르는 반면, 남성의 경우 ‘아저씨’와 ‘신사’가 동시에 떠오른다. 불공평한 처사지만, 흠. 사실이다.
갈수록 결혼을 거부하는 ‘골드미스’가 늘어나고, 혼인인구 대비 출산율이 저하되면서 다시 한 번 ‘여성과 가정’에 대한 사회학적인 진단이 속속 출현하고 있다. 비단 ‘직업과 결혼’이 인류 최대의 딜레마는 아니지만, 적어도 동양문화권 내 존재하는 여성들에게는 벗어 던질 수 없는 짐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느 때보다 ‘섹스 앤 더 시티’에 등장하는 ‘중년의 언니’들이 써나가는 신(新)여성사가 머나먼 토스카나 지방의 사프란 리조또 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진다. 꿈나라 탐험은 두 시간 남짓, 극장에 불이 켜지면 ‘띵동!’. 현실로의 회귀다, 안타깝지만.
전작 <여왕의 교실>과 <톱 캐스터>등을 통해 줄곧 강인한 직업여성 이미지를 구축해왔던 아마미 유키가 서른 아홉살의 정신과 의사 오가타 사토코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어라운드 40>. 뭐, 제목에서도 ‘너무 잔인하게’ 드러나듯이 마흔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전문직 여성이 겪는 사회적∙개인적 갈등을 그린 드라마.
핀란드 헬싱키의 한 골목에 일식당을 차린 사치에(고바야시 사토미 분)는 장사가 되지 않아 한 달 넘게 고민을 거듭한다. 그러던 와중에 미도리(가타기리 하이리 분)와 마사코(모타이 마사코 분)가 우연히 식당에 모여들면서 여러 일들이 생긴다. 아름다운 핀란드의 자연과 소박하지만 임팩트있는 일본의 식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난 영화. 소프트한 버디무비로서도 손색이 없다.
중대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두 작품을 보면서 느낀 건 그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는 풀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개중에는 풀리는 것도 있지만 말이다. 일과 결혼, 거기다 출산의 문제까지. 이 범주에 국한시키고 보면 서른에도 막막했던 문제들이 마흔이 되었다고 해서 초강력 파스마냥 시원스레 해결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들은 끙끙대고, 울거나 웃거나, 불행해하기도 행복해 하기도 한다. <어라운드 40>는 이 문제를 조금 더 현실에 가깝게 두고 본격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에게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결혼생활을 해 나가는 친구들이 있고, 아이가 있거나 없거나, 돈이 많거나 없거나, 모든 처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각자의 문제로 괴로워한다. 반면 <카모메 식당>은 조금 더 진화한(?) 삶의 형태를 보여준다. ‘일이냐 가정이냐’의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 한 여성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선택한 이국에서의 삶 안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선택을 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지에 주목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는 그다지 우울하지 않은 모습으로, 아니 더 정직히 말해 유쾌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우정은 남자의 전유물만은 아닌 듯
<어라운드 40>와 <카모메 식당>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 한 가지는 세 명의 여성(친구)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욕망을 가지고 서로를 다독이면서도 때로는 시기하고 반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무적인 건 이 ‘여성동맹’이 꽤나 탄탄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페미니즘’적인 수사를 달지 않더라도 그들은 동일한 정체성과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며 자신들의 여성성을 더 큰 조화를 위한 분모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남성들의 뜨겁고 끈적거리는 우정과는 또 다른 형태의 우정이 가능함을 어필한다. (영화 <카모메 식당>은 이를 넘어서서 여성공동체를 통해 일종의 ‘유토피아’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결국 중년?
이러나 저러나 결국은 중년의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 쌩쌩하기만 했던 몸뚱아리가 점차 ‘노화’되어 감을 진저리나게 느끼기 시작하는 나이. ‘젊은 것’들이 이유 없이 얄밉게 느껴지는,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유년을 그리워하게 되는 나이. 일에서나 가정에서나 안정적인 위치에 놓여있지만 저마다의 ‘구멍’을 안고 사는 나이. 그래서 멋지기도 하고 서럽기도 한 나이. 그래서 위기가 될 수도 있는 나이. 이충걸이 경고했듯 ‘젊음을 자만하려는 것’이 아니다. 혹은 중년을 메인스트림의 가치로 어설프게 포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중년일수도 있고, 아직 아닐 수도 있고, 애저녁에 지났을 수도 있다. 그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온, 오지 않은, 혹은 지나버린 시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한번쯤 ‘어떨까’하고 턱을 괴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당신이 여성이라면 중년이 비단 ‘풍요로 넘치는 마법의 옷장’이 아닐 수도 있음을 가늠해 볼만하다.
#p.s
위의 드라마와 영화 모두 출연하는 연기자가 바로 '카타기리 하이리'다. 워낙 강렬한 인상을 주는 배우라 <카모메 식당>에서 처음 접하고는 리서치를 무진장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후후) 그 이후 <어라운드 40>에서 여주인공의 연하남의 누나로 등장해, 범상치 않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참, 이유없이 호감가는 스타일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중독성 있는 캐릭터다. 주목해 보시길.
두려움의 실체는 대부분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상이 빗나가 스스로 혼란을 야기했든, 상대와의 불신으로 인해 변수가 생성되었던 간에 말이다. 두려움은 철저히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 혹은 객체와의 관계설정에 달려있다. 그에 따라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인 두려움과는 약간 궤를 달리하는 두려움이 있다. 자신과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비치기까지 하는 존재(?)로부터의 공격. 그리고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개인. 그들의 반응. 그들의 ‘이후의 문제’.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모든 것은 무방비다. 나이트 M. 샤말란의 신작 <해프닝>은 그렇게 모든 의문을 향해 관객을 ‘무방비로’ 노출시킨다.
에피소드 1.
개봉을 하자 마자 차선책으로 선택했던 이 영화를 앞에 두고 동행들에게 했던 질문은 단 하나. “무서워?”였다. 함께 한 영화학도 하나는 “아냐. 심리극일꺼야.”라고 단호히 말했고, 그의 말에 현혹되었던 (나를 포함한) 다른 무리들은 ‘설마’하는 심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아니나 다를까, 초반부터 충격적인 장면들을 내뱉던 <해프닝>은 정말 제목 그대로 ‘해프닝의 연속’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려는 인상을 주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물론 샤말란의 여느 ‘포스트 식스센스’ 작품군과 비슷하게 말이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팝콘을 집어 던지는 관객들 사이로 들리는 외마디. “아이씨, 어쩌라고.” 적어도 당시에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말이다.
에피소드 2.
학기 중 ‘서울에 대한 향수’를 앓다 무작정 씨네큐브를 향해 갔던 적이 있었다. 때마침 극장가를 들끓게 했던(비록 소규모였지만) 코엔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상영 중이었다. 앞 줄에 앉으신 ‘뽕머리’ 아주머니의 방해전략을 뚫고 한 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그 영화가 2/3 지점에 왔을 때, 이야기를 이끌어가던(적어도 그런 척을 했던) 주인공이 ‘픽’하고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 돌연사(!)에 관객으로서 두 가지의 두려움을 느꼈다. 믿고 의지했던 플롯의 축이 화자의 죽음으로 인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화자와 대적했던 안티-프로타고니스트의 존재가 무의미해짐에 대한 두려움. 어쨌든 관객으로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영화는 관객의 패닉을 방관하진 않았다.)
에피소드 3.
이번 주 ‘필름 2.0’은 샤말란의 <해프닝>을 커버스토리로 다루고 있다. 다양한 평론가에 의해 여러 시각으로 같은 영화를 보게 한 이번 기획을 통해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평론에 따르면 미국 공포영화는 ‘9.11’을 전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고, 미국인들이 그를 통해 겪은 생생한 체험이 영화(특히 공포영화)를 통해 징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샤말란 감독 또한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해프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인간이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을 때, 바로 그 순간을 캡쳐해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이 가지는 충격의 강도와 곧바로 이어 생길 두려움 간의 상관관계. 그 ‘충격-두려움 공식’에 대한 가감 없는 기록인 셈이다. 물론 샤말란이 <해프닝>을 통해 미국이 겪어야 했던 테러에 대한 막연한 공포, 그리고 실제적 증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팠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영화에 보여지는 것처럼,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즉,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바로 우리의 눈 앞에서 펼쳐질 수 있음에 대한 가능성, 그리고 그 다음에 인간이 어떠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는 지에 대한 탐구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물론 앞의 에피소드에서 보여지듯, 공포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습관적인 기대심리는 음모가 밝혀지는 등의 사건해결의 면모일 것이다. 그러나 <해프닝>은 이러한 공포영화의 문법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낯선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는 ‘보는 당시의 충격’이상으로 ‘보이지 않은 충격’을 선사한다. 왜냐하면 쇼킹한 장면의 이면에 숨은 실체를 이성적으로 되짚어보고자 노력하지만, 그 상이 모호할 뿐 (이성적으로는) 그 어떤 논리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매우 감각적이다. 논리적 수사나 이성적 방어도 속수무책이다. 그저 감지할 뿐, 어떻게도 대처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오늘의 사회를 매우 닮았다. 혼란에 익숙해져 있고, 불분명한 명제에 둘러싸여 있는 현대인에게 너무나 ‘친근하면서도 그렇기에 두려운’ 바로 그런 속성이다. 그게 나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그러기에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거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