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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에 해당하는 글들

  1. 2008/10/07  모던 보이
  2. 2008/09/29  영화는 영화다 (5)
  3. 2008/08/13  고민하는 영웅 (2)
  4. 2008/07/04  안경 – 삶에 대한 조망 (2)
  5. 2008/06/29  중년 즈음에,
  6. 2008/06/27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모던 보이

처음엔 두근거렸다가, 조금 있으니 설마설마하다가, 은근슬쩍 화가 나다가, 점점 민망해졌고, 결국은 포기했다. (이게 내 인생 가장 짧은 리뷰로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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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감독은 <해피엔드>,<사랑니>때 보통이 아니다, 남성감독이 어떻게 이렇게 심리묘사가 내밀할까, 감탄에 감탄을 연속했던 이었는데. 봄부터 나온다 만다 말도 많고 기대도 많았던 작품이었는데. 어찌된 사정인지 뒤늦게 개봉을 했고, 후반작업에서 시간이 지체되어 재()편집을 스무 번쯤은 한듯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도 좋으면 그만인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거다. 시나리오 자체서부터 인물의 심리적 변화에 따른 근거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동시에 인물설정과 사건전개간의 개연성 또한 빈약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근본적인 의심을 낳게 했다. (, 속상해) 얼마나 좋은 조건인가. 최고의 남녀배우와 최고의 배급사와 최고의 세트(그리고 CG)가 가세했는데, 결과물이 이토록 초라하다니. 아이에게 땡 빚을 내어 최고급 과외를 시켰는데, 일년 후에도 성적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라는 가정과 비슷하려나. 역시 영화를 한다는 것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과 똑 같은 가보다. 정 감독님, 많이 속상하시겠지만-팬 이던 저는 더 속상해욧ㅠ  

2008/10/07 00:20 2008/10/07 00:20

영화는 영화다

. 제목하고는. (속된 말로) 아구가 이렇게 딱딱 맞는 영화를 보면 보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막판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장훈 감독의 <영화는 영화다>는 추석 연휴 내내 조용한 흥행성적을 내면서도 농도 있는 짜임새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대략적인 플롯을 알고 갔던 터라, ‘이게 과연 이야기가 될까란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타고난 이야기꾼의 하드보일드는 빠른 후크에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김기덕의 내공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소.간.지

 

우려했던 강지환의 연기는 생각보다는 나았다. 특히 정적인 씬에서는 그의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났지만, 되려 감정을 휘몰아치면서 들어가는 부분에서는 놀라울 만큼 노련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8할은 소지섭(이 영화 이후로는 소간지) 이 끌고 간다고 봐도 된다. 혹자는 소간지의 우수에 젖은 눈빛과 몸의 디테일이 얼치기 스타의 후까시와 어슷하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또는 소지섭의 연기는 발리에서 생긴 일’, ‘미안하다 사랑한다로 이어지면서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고 평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지섭의 경우에는 그 간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쭉- ‘그 안에 갇힌다 해도좋겠단 생각이 든다. 간지도 아무나 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놈놈놈에서 정우성이 보여준 수려한 카우보이놀이나 이 영화에서의 소지섭의 간지 나게 담배 피우기등은 후천적인 반복학습에도 기인하겠지만, 그보다는 타고난 간지성이 내재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 그들의 기럭지는 덤이고, 기본기는 존재감이란 거다. 거기서 간지의 정점이 찍히는 거다. (주변의 한 친구는 소간지 때문에 영화를 두 번이나 봤다고 하니, 말 다했다. ‘놈놈놈때도 말했던 거지만, 간지나는 것도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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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폭력

 

엄연히 감독 난에 장훈이라는 두 글자를 보면서도 넓게 드리워진 김기덕의 그림자를 거두어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시나리오를 탑처럼 쌓아두고 아래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빼서 영화를 찍는 다는 통설처럼, 그는 응어리진 이야기 더미를 끌어내듯 후두두둑 뱉어낸다. 외람된 비교인지는 모르지만, 김기덕을 보면서 문득 김아타가 떠올랐다. 둘 다 내게는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사람들이지만, 번뜩이는 재능을 지닌, 범상치 않은 이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그 누구보다 철학적이고 변칙적이면서도 동양적인(나는 가장 동양적인 감독과 사진작가로 이 둘을 꼽겠다. 엄한 국악인을 갖다 붙이는 건 너무 일차원적이지 않은가.) 이 둘은 아마도 그렇기에 우리보다는 서양권에서 환영 받나 보다.

각설하고 김기덕은 영화에서 영화와 폭력이라는 상관없어 보이는 두 주제를 잘 배합하고 있다. 연기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있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하다가 영화 속 폭력을 현실에서의 폭력으로 치환시켰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에 대해 리얼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둘 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 바깥 어디선가 유유자적하게 현실을 조소하는 듯한 분위기가 묘하게 다가온다. 잘 나가는 영화배우나 깡패나 삶이 진짜 같으면서도 가짜 같은 것은 비슷한 거 아니냐고 어르기도 한다. 결국 김기덕이 말하고 싶었던 건 영화의 의미와 그 안에 담기고자 하는 진정성에 대한 재고가 아닐까 한다. 현실을 대변하는 요소로서의 폭력은 오히려 더 영화적이다. 곧 죽어도 연기가 생명인 배우의 눈 앞에서 실제 사람을 죽이는 깡패의 액션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한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영화가 있느냐고, 감독은 자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자체도 영화의 일부분이다. 영화 속에 영화가 있고, 또 그 안에 인물들에 내재된 각각의 영화(세계)가 있는 꼴이다.

 

여전히 남겨진 숙제

 

물론 김기덕이 여성을 배치시키는 문제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극중 홍수현이 소지섭에게 다가가고 마음을 여는 부분은 생략된 서사가 많다. 주변인물들의 행동에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치기가 부족했고, 설명을 위한 컷이라고는 하지만 군더더기같이 느껴졌던 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소소하게 빛을 발하고 있어 기특하다. 아니, 멋지다.  

2008/09/29 20:33 2008/09/29 20:33

고민하는 영웅

미국의 블록버스터가 변하고 있다고 예견된 건, <다크 나이트> 개봉 훨씬 전부터의 일이었다. 심플하기 짝이 없는 권선징악의 거대명제 아래 볼거리만 풍성하면 빈약한 서사도 다 덮어주겠다던 것이 미 블록버스터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슈퍼맨’, ‘스파이더맨등으로 이어지는 코믹북 영웅 계보에도 이와 같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쳐 영웅 서사의 진화가 이상 징후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각각 영웅으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변종이 된 계기는 각기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람의 힘으로(, 치안, 공권력 등등)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공동체의 안녕을 21세기적 켄타우루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에게 일임하는 식의 극 설정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스파이더맨 3>에서 보여진 바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추앙 받았던 영웅은 더 이상 절대 선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자신이 지키고자 노력해 왔던 가치들과 절대 선의 문제에 대해 반문한다. 원론적이지만,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절대 선은 존재할 수 있는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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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 나이트>는 여러모로 기대가 많았던 작품이었다.
히스 레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면에서나 영원한 조각남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새로운 배트맨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기대심리에서나 <다크 나이트>의 개봉을 앞두고 밤잠 설칠 이유는 꽤나 많아 보였다. 대형 포털의 거의 만점에 가까운 별점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크 나이트>에 대해서 약간은 염려스러운 시각을 던져볼까 한다. 누구나 이미 백만번쯤은 이야기했든, 조커 역의 히스 레저는 살아있는 조커의 모습을 완벽 그 이상으로 재현해 내었고, 외모로 차가운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크리스찬 베일은 배트맨 중 최고였다고까지는 못할 망정 2등 정도는 되었다. (사담이지만, 그의 최고작은 뭐니뭐니해도 <아메리칸 싸이코>가 아닐까.) 배트맨의 연구소는 돈 냄새를 하도 풍겨 관객의 후각이 마비될 정도였고, 건물 몇 개, 도시 하나 쯤은 뻥뻥하고 초토화시키는 영상은 블록버스터 상위권 안에는 안정적으로 안착할 듯 보였다.

 

그러나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가면 쓴 영웅을 필요로 하는가. 더 디테일하게 질문하자면, 우리는 고민하는 가면 쓴 영웅을 필요로 하는가. 대답은, 글쎄요,. 예를 들어 본 시리즈제이슨 본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시스템의 최고 선에 대해 도전하는 류와 배트맨은 시작점부터가 다르다. ‘의 고민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배트맨의 고민은 글쎄. 후작을 만들어 내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는 듯 하다. 세계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홉스가 장담했던 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구도로 나아가는 가운데 배트맨과 같은 초월적 수호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했을 법하다. 그러나 그 고민은 제작자와 감독의 것이지, 그를 직접적으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서사를 통해 드러났어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조커가 왜 끊임없이 살상을 저지르고 파괴를 일삼는지에 대한 이유는 전혀 설명해 주지 않으면서 배트맨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선의 개념에 대해서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 개념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그의 절대성을 인정해주는 대신 의 개념은 선한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악을 낳으면 그것도 선인가하는 식의 사고로 상대적으로 추락시키는 느낌을 준다. (그렇게 허술한 논리로 배트맨이 됐을 거면, 애초부터 만들어내지 말지 그랬냐는 비판도 종종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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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스파이더 맨과 더불어 배트맨에서 공통적으로 관객이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바로 초인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담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는 조커가 지적하는 바대로 너 같은 변종은 나와 같은 존재야라고 반격당하기에 좋은 부분이기도 하다. , 영웅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를 추종하며 그의 보호 아래 있었던 다수의 사람들은 요동하기 시작한다. 그의 존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있어야만 완전해질 수 있는 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OO하는 류의 미국 영웅이 철저히 인간의 시점으로 돌아와 선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라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모습이 (이해는 십분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언젠가 정치철학 세미나 때 정당한 전쟁은 있는가란 질문을 던졌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선이든 악이든 하나의 행위로 인해 파생하는 결과는 늘 양면적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선 다면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는 (모순이지만) 선택적이면서도 비선택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말인 즉, 그가 예측가능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왜 배트맨은 조커를 죽이지 못하는가. 죽이지 못하는 것이 절대 선인가. 아니면 절대 악으로 상징되는 그를 제거하는 것이 절대 선인가.’라는 질문)

 

고민하는 영웅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영웅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은 달달하면서도 쌉쌀하다. 영웅을 섣불리 짬짜면면으로 만들게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냥 단순명료했던 옛날의 촌스런 영웅이 그립다. (사는 것도 복잡해 죽겠는데, 왜 영웅까지 복잡하고 난리야!)    


2008/08/13 16:16 2008/08/13 16:16

안경 – 삶에 대한 조망


난 알고 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Mir ist bewusst, was Freiheit bedeu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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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가미 나오코의 두 번째 영화 <안경>은 중반부쯤 한 인물의 입을 통해 자유에 대한 꽤나 그럴싸한 몇 마디를 읊조린다. (그것도 독일어로) 남자의 독백이 흐르는 가운데 에메랄드 빛으로 가득한 바다와 바닷물의 끄트머리에 잔잔히 부서지는 하얀 파도, 그리고 그와 눈부신 띠를 만드는 고운 모래. 해변가에 한가로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인물들 위로 카메라는 유영하고, 남자는 말한다. 난 알고 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난 알고 있다.


자유박탈 + 여유결핍

 

참 이상할 노릇이다. 오늘의 우리는(적어도 내전이 일어나는 지구촌 몇몇을 제외하고서는) 자유가 박탈된 적이 없었다. 외형적으로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자유가 있었는지도 까마득하고, 아니면 원래 자유라는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중에 홀연히 사라진 건지 가물가물하다. 여유라는 녀석도 마찬가지다. (같은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는 레저라는 이름으로 여유를 포장하고, 보기 좋게 진열하여 얼마에 드릴 테니 이번 기회 놓치지 마세요하면서 끊임없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참 우스운 일이지만, 무형적인 뭔가를 판다는 것은 사천만의 봉이 김선달을 복제해낸 것과 맞먹는 충격을 주곤 한다. (아니 어떻게 내 인생을 가 책임지며, 아니 어떻게 내 행복을 가 파는 것인가.) 어떤 가치가 포화된 상태는 그것이 부재할 때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일까. 곁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비가시적인 무언가를 찾아서 떠난다는 게 무슨 소용이며, 그게 찾아진다고 찾아지는 것일까. 이내 자포자기하며 자리에 누워버린다. 에라이, 모르겠다. 알게 뭐람. 그깟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어쩔 줄 몰라,

 

너나 할 것 없이 흔히 발견되는 현대인의 증상은 바로 어쩔 줄 몰라,’()이다. 처음 만난 이들끼리는 물론이거니와 수 십 년을 맞대고 살아온 가족 간에도 밥상을 마주할 무렵 어쩔 줄 몰라하는 경우가 적잖다. 젓가락질 몇 번에 먼산은 열 댓 번 쳐다보는 식이라면 설명이 쉬우려나. 대화의 부재, 소통의 부재가 문제라지만, 정작 더 문제는 어쩔 줄 몰라’()이 심각해져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순도 100퍼센트의 사족(蛇足)’이다. 한 마디로 필요 없는데도 막무가내로 껴주는 특별사은품같은 존재라는 거다. ,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하루에 꼭 필요한 말은 과연 몇 개나 될까. 나는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가. 관심이 있어서인가, 진심이었나, 그냥 무뚝뚝한 순간을 대체해보려는 수단이었나, 팔을 비비 꼬는 민망함을 모면하기 위한 술수였나. 그 많은 말을 왜 했을까. 그 많은 행동을 왜 했을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알고 보면은. . 결국 어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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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에 대한 면죄부

 

영화 속 한적한 하마다 여관을 찾은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 분) 또한 처음 섬마을 사람들의 사색에 적잖이 당황한다. 사색이라, 사색이라니. 애초에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지구 같은 거 없어져버렸으면했던 그녀의 마음도 하마다 여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저 휴대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으로 떠나고팠다는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낯섦, 그 자체였다. 상상컨대 그녀 또한 (우리처럼) 쉴새 없이 진동이 울려대고, 하루에도 수십 건의 스팸 메일을 삭제하고, 필요하건 불필요하건 사람들과 부딪히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무언가를 구입하고. 소비의 연속 가운데 정작 가장 빨리 소모되는 것은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 채, 모든 것을 대도시의 리듬에 맡겨버렸으리라. 그런 생활을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반복하면서 갑작스레 맞이한 휴식 가운데 주어진 시간이라니! 무릎이 한껏 튀어나온 트레이닝 복을 입고, 집 앞 슈퍼에서 첫사랑과 우연히 조우했을 때보다 백만 배쯤 더 어쩔 줄 몰랐으리라. 그렇게 당황한 그녀를  하마다 여관은, 영화는 보채지 않고 느긋이 기다려준다. 그녀가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관객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그래서 사색이 하릴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잉여활동의 일부로 폄하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뭐라던 간에 존재가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는 한 뼘 남짓한 시공간을 선사하는 둘도 없는 선물임을 깨우친다. 그렇게 <안경>사색이 담배 한 가치 물면 자동으로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님을, ‘여유가 홈쇼핑 채널의 패키지 상품으로 구입할 수 없는 것임을 찬찬히 훑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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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기

 

정작 동명의 까페에 가면 그다지 느리게 걷는다는 느낌이 나질 않는다. 소비가 소비를 소비하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찾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대신 이것을 상상해 보라. (영화에서 힌트를 얻었으니, 영화를 일단 보()는 게 도움이 될 듯.) 일체의 기기를 버리고 적막가운데 처하라. 그곳이 자연과 근접해 있는 곳일수록 좋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잠시 어딘가로 치워둬라. 필요한 건 자신의 몸뚱이와 정신, 그거면 족하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정하라. (처음엔 여기저기로 시선이 쏠리겠지만) 한 군데를 응시하고 마냥 고정하라. 그리고 지겨워질 때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라. 그 가운데 누군가를 떠올린다 던지, 지나간 사건과 시간을 되짚어본다 던지, 일어날 일 혹은 하고자 하는 일을 상상해 보는 것도, 아니면 영 엉뚱한 무언가에 대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사라졌던 감각이 되살아날 것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될 것이다. 매일 먹는 밥알에도 색깔이 있고, 향취가 있으며, 고유의 맛은 물론이거니와 일종의 여운까지 남김이 새삼스레 느껴질 것이다. 주변의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지럽게 정신을 수 놓았던 망상들이 하루아침에 말끔히 정리되었음에 안도할 것이다.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이렇게, 별 게 아니다. 그리고 별 게 아니라고 여기는 만큼 하찮게 치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대로 시류에 동승하지 않는다는 인상에 나만 뒤쳐지고 있다는 불안감을 주조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는 느리게 걷기를 거부해왔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함을, 더 늦기 전에 알아채야() 한다.

 

영화 <안경>을 보면서 주말농장에나 가봐야겠군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삶에 대한 조망이라는 것은 인위적인 요소들을 한 곳에 진열해 놓는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숨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찾아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하루가 걸릴지, 평생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아련하기에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 준비 되었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안경을 벗고, 나만의 안경을 찾아 떠나보자.   



2008/07/04 08:58 2008/07/04 08:58

중년 즈음에,

사족1.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해 중년이란 단어 자체가 아직 섹시한 지는 모르겠다. 물론 성숙한, 보다는 숙성된,이 더 잘 어울리는 나이가 언젠가는 좋아지겠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조지 클루니나 브래드 핏 모두 중년에 더 멋져졌다는 얘기는 들먹거릴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외쿡의 경우다. 모두 솔직해지자.)

 

사족2. ‘중년의 사전적 의미는 마흔 살 안팎의 나이. 다른 말로 하자면 청년과 노년의 중간지점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디까지나 과거의 기준에 의한 정의다.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100세까지 바라보는 것이 낯뜨겁게 되지 않은 이상, 마흔 안팎을 과연 중년이라 부르는 것이 맞는 지 모르겠다.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 사람이 동성보다는 이성에게 더욱 관대하다는 심리학적 근거를 뒤로하더라도.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는 단연 중년의 남성상이 연배의 여성상에 비해 찬란한 경우가 많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우리 머리 속에 각인된 이미지 또한 중년의 여성 하면 아줌마가 퍼뜩 하고 떠오르는 반면, 남성의 경우 아저씨신사가 동시에 떠오른다. 불공평한 처사지만, . 사실이다.

 

갈수록 결혼을 거부하는 골드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