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회, 2008 가을

아버지는 아직도 손으로 직접 도면을 그리신다. CAD도사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손끝의 감각을 이용해 집의 모양을 그려낸다는 것은 아날로그적이다 못해 무뎌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도 난 아버지의 도면이 좋다. 수많은 제도샤프와 각가지 모양의 자, 수 십 년은 족히 된 비스듬한 제도책상과 깜빡이는 램프 그리고 번지고 때가 묻은 채 돌돌 말려진 제도용지들. 아버지의 작업실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아 말도 안 되는 그림을 그리곤 했던 딸과 늘 그런 딸을 하염없이 예뻐해 주셨던 아버지가 함께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블로그를 통해 소개했던 글 ‘디자인 열변’을 우연히 아버지께 보여드린 것이 계기가 되어 「건축과 사회」 2008 가을호에 ‘디자인 서울, 디자인 코리아를 슬프게 환영하며’라는 실리게 되었다. 원래의 내 글에 아버지가 덧붙여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형식으로 완성된 이 글은 내 입장에서 보자면 한 없이 부끄러운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함께 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가슴 한 켠이 터져나갈 정도의 충만함을 선사하는 이벤트로 기억될 것이다. 하하하. 아버지와 딸. 이보다 뭉클한 단어가 또 어디 있을까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