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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에 해당하는 글들

  1. 2008/11/02  건축과 사회, 2008 가을
  2. 2008/10/02  건축, 말하다 1
  3. 2008/09/12  [타임뮤지엄] 오디오북 시리즈 14
  4. 2008/08/21  Artpolis (1)
  5. 2008/07/11  디자인 열변

건축과 사회, 200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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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직도 손으로 직접 도면을 그리신다. CAD도사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손끝의 감각을 이용해 집의 모양을 그려낸다는 것은 아날로그적이다 못해 무뎌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도 난 아버지의 도면이 좋다. 수많은 제도샤프와 각가지 모양의 자, 수 십 년은 족히 된 비스듬한 제도책상과 깜빡이는 램프 그리고 번지고 때가 묻은 채 돌돌 말려진 제도용지들. 아버지의 작업실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아 말도 안 되는 그림을 그리곤 했던 딸과 늘 그런 딸을 하염없이 예뻐해 주셨던 아버지가 함께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블로그를 통해 소개했던 글 디자인 열변을 우연히 아버지께 보여드린 것이 계기가 되어 「건축과 사회」 2008 가을호에 디자인 서울, 디자인 코리아를 슬프게 환영하며라는 실리게 되었다. 원래의 내 글에 아버지가 덧붙여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형식으로 완성된 이 글은 내 입장에서 보자면 한 없이 부끄러운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함께 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가슴 한 켠이 터져나갈 정도의 충만함을 선사하는 이벤트로 기억될 것이다. 하하하. 아버지와 딸. 이보다 뭉클한 단어가 또 어디 있을까 싶은 밤이다.

2008/11/02 00:00 2008/11/02 00:00

건축, 말하다 1

얼마 전 누군가 말했다.

내가 속한 곳은 아마 천안 정도가 되지 않을까. 서울과 대전 중간 지점이랄까.”

누구든 일 때문이던 다른 이유 때문이던 두 곳 이상의 곳에 자리를 트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고, 그 안의 문법에 점점 익숙해져 간다.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차이는 있지만 시간에 비례해 적응력을 발휘하고, 애초의 변화는 더 이상 변화가 아닌 것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공간에 환경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

 

어린 왕자와 장미의 이야기가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그와 같은 관계가 도처에서 맺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안의 질서, 도식, 기호 등에 의해 많은 것은 약속되고, 이행된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 자연의 변화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거생활은 온/오프라인 이상의 3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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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그렇다면 당신에게 말을 거는 건축은 무엇인가. 혹은 그런 경험이 있었는가. 개인적으로는 유럽의 많은 고 성당들을 꼽고 싶다. 양식과 지역에 따라 분위기도 조금씩 다르지만, 그래도 수세기 이상의 역사를 지닌 유럽 고 성당들이 가지는 일련의 분위기는 상당히 유사하다. 여러 성인들의 모습이 스테인드글라스나 명화로 또는 벽화로 남아있는 모습들과 내부의 가지각색의 양식과 사제, 오르간, , 성수 등은 드나드는 이들에게 일관된 성스러움을 대변한다. 전통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주변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르 꼬르뷔지에의 롱샹 성당은 또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하는 듯하다. 절묘하게 위치한 창문 사이로 하루의 시작과 끝이 반복된다. 때로는 위압적인 분위기나 지나친 신성화로 불편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지만, 고 성당만큼 강력한 어휘를 가진 곳을 찾아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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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아백화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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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 에르메스, 도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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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하얏트, 서울


#명품관과 6성호텔

 

누구나 부자였으면 하는 시대, 쉽게도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인지 상류1%

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실상으로 들어가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이 어쩌면 당연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 성당에 버금가게 내게 중압감을 심어주는 곳은 명품관과 6성호텔이다. ‘, 그런 데 안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생각 외로 생각지 못했던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경우가 많다. 명품관의 외관이나 숍 구성 모두 난 네가 관심 없어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VIP로 승격하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여전히 자신의 옹벽을 고고하게 지킬 때가 많다. ‘디자인 열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서울의 한 6성호텔은 파격적인 건축문법의 생략을 통해 자신만의 유니크함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 그리고 너라는 완벽한 이분법 속에 수많은 인간 군을 분류하고자 하는 오만함이 묻어있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공동주택과 그들의 안전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사회가 양극화 되고, 세분화 되어 갈수록 자그마한 형태의 특수화된 커뮤니티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 것이고, 그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특권의식이나 안전양식도 다양한 형태로 진화할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그런 권리와 자유를 선택하는 건 더 이상 거대한 정부도 국가도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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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대전


#
카이스트

 

다다른 질문은 그거였다. How about me? 내가 처한 지금의 환경은 꼭 최상의 것은 아니 것 같다. 영상원에 있을 때도 늘상 고민하던 것이 고립과 도태의 문제였다. 그런데 같은 문제를 이곳 카이스트에서도 하고 있다. 국내 산업 구조상 또한 사회 특성 상 비서울권에 위치한다는 것은 많은 단점을 안고 간다. 대전이 물론 그 어느 지역보다도 튼튼한 연구기반을 갖추었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지만, ‘사회 안의 학교’, ‘학교 안의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본다면 이는 분명 간과하기엔 심각한 부분일 것이다. 카이스트 내부적으로 보더라도 건물이 말한다는 인상은 받기 어려워 보인다. 문화기술대학원과 HUBO Lab이 위치한 곳은 사정이 조금 낫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평균적으로 효율성만을 고려한(때로는 그 유일무이한 가치인 건물의 효율성에 대해서도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되지만) ‘재미없는 건물들이 즐비해 있다. 과마다 특성이 있어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사회와 소통하는 과학기술대학으로서는 부족한 이미지가 있다. 이충걸이 말했던 대로 난 지큐를 주목하지 않는 독자를 주목하진 않아요와 같은 맥락이라면 좀 곤란하다. 불확실의 시대에 손님이 알아서 찾아오기를 바라는 태도는 수동적이다 못해 못나 보이기까지 한다. 사랑스런 부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 그래도 이 곳의 건물들과 장기간의 연애는 불가능해 보인다. , 나른한.

+서울대 언론정보학과의 이중식 교수님이 진행하시는 '디지털 건축' 수업의 일환으로 써 본 스케치  

2008/10/02 11:48 2008/10/02 11:48

[타임뮤지엄] 오디오북 시리즈 14

Creative Mind #episode 1

 

Daniel Liebeskind

베를린의 유대박물관으로 잘 알려진 스타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 그와 떠나는 첫 번째 크리에이티브 마인드. 비대칭의 연속을 경험케 하는 그의 건물 안에서 괴기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난과 핍박의 유대역사와 그를 형상화했던 리베스킨트의 도면 사이를 잠시나마 걸어보고 싶다. (아래 드로잉은 Royal Otario Museum을 그린 것이니, 착오 없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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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Mind 에피소드는 앞으로 다양한 창작가들이 걸어간 길을 되돌아보며, 그들이 말하는 크리에이티비티에 대해 귀 기울여 보고자 한다.

 

건축으로 현실을 창조하다, 다니엘 리베스킨트; 크리에이티브 마인드, 마이어스/거스트먼 공저, 에코리브르, 2008, 68-69p.   

2008/09/12 21:06 2008/09/12 21:06

Artpolis

아트폴리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뜻하는 ‘polis’와 예술을 지칭하는 ‘art’가 만나다. 그 이름만으로도 떨리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커뮤니티의 색깔을 입혀나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란 걱정이 뒤따른다. 건축가 개인에게 주어지는 프로젝트가 아닌 그 도시 안에 사는 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도시디자인.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선상에서 아트와 폴리스가 대면하는 것이 아닐까.

 

최근 전주시가 아트폴리스 프로젝트를 내놓고 야심 찬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전주시가 가지는 역사적문화적 의미와 한옥마을등지로 대표되는 전통 건축 양식, 그리고 주변의 청정지역까지 포함해 새로운 개념의 아트폴리스를 만들어나가겠다는 포부다. (송하진 전주시장 인터뷰) 이러한 아트폴리스의 개념을 좇아 올라가다 보면 일본 규슈의 중부를 차지하고 있는 구마모토 현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전 총리이기도 했던 호소가와 모리히로가 구마모토 지사로 근무했던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트폴리스 프로젝트는 전후(戰後) 획일적인 일본 건축양식에서 탈피해 지역의 성격과 환경에 부합하는 도시디자인을 육성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이후 세이와 분라쿠 극장, 구마모코 북 경찰서, 타마나 천문관, 미래의 숲 박물관 등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독창적이면서도 구마모토다운아트폴리스를 완성했다. 호소가와 모리히로가 지사로 근무할 당시만해도 구마모토 현은 수은중독 공해병으로 잘 알려진 미나마타 병으로 버려진 섬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그는 후대에 남는 건 문화밖에 없다는 선각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구마모토의 이미지를 혁신적으로 바꿀 문화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그 중 첫 번째로 도입한 제도가 일명 커미셔너 제도이다. 이는 아트폴리스를 수립하기 위해 그를 맡고 있는 최고 책임자인 커미셔너가 각각의 건축사업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건축가를 추천하는 제도다. 호소가와의 제안을 받아들인 초대 커미셔너 이사자키 아라타를 비롯하여 2대 커미셔너 다카하시 데이이치, 3대 커미셔너 이토 도요오 (기사링크)등 기라성 같은 건축가들이 아트폴리스의 근간을 마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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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북 경찰서


 

그를 통해 탄생한 것이 위에서 잠시 언급한 건축물들이다. 마치 거꾸로 서 있는 듯한 인상의 구마모토 북 경찰서는 통상적으로 권위적일 거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린 파격적인 건축물로 평가 받고 있다. , 경찰서란 위법한 행위를 처벌만 하는 무시무시한 공간이 아니라 시민의 불편해소와 안녕을 위해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곳이라는 편안하고 익살스럽기까지 한 이미지를 준 것이다. 그 외에 기하학적인 디자인이지만 주변의 언덕 등과 잘 어우러진 타마나 천망관, 원뿔 모양의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의 미스미 항구 페리 터미널 등은 구마모토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일본 경기가 침체되고 아트폴리스정책이 계속되면서 시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표하는 이미지로서의 디자인이라는 의미는 있지만, 점차 독창적인 디자인에만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과의 교감이 점차 약화되었다는 지적이었다. 결국 구마모토 3대 커미셔너인 이토 도요오는 아트폴리스 정책에 공개심사제도라는 새로운 터닝 포인트를 제공했다. 아트폴리스 공모전에 참가한 건축가들이 공개경쟁을 통해 설계안을 발표하고, 그 심사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직접 건축가들과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겪게끔 한 것이다. 나아가 구마모토 현에는 도시의 디자인을 전담하는 디자인 사무국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해당 부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도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는 등, 오프라인을 통한 지역자치정부와 시민 간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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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호쿠 정민홀



아트폴리스와 유사한 형태로 진행된 14년간 50억을 들여 완성한 프랑스의 그랑 프로제(Grand Project)’ 또한 오늘의 파리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모리히로 지사처럼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미테랑의 굳은 철학이 아니었다면 하나의 도시를 그 도시에 맞게 디자인한다는 발상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아트폴리스건 (더 넓은 의미에서) 도시디자인이건 윗선상의 일방적인 정책추진형태로는 그 어떤 프로젝트도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도시의 잠재력과 정체성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큰 눈과 그 안에서 작은 부분들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작은 눈들이 함께 모여 그림을 그려나갈 때만이 각각의 도시에 적합한 모습을 창조해나갈 수 있다.

2008/08/21 09:00 2008/08/21 09:00

디자인 열변

사카이 나오키의 디자인의 꼼수(원제: Plot of Design)’을 뒤적거리다 순간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불만의 모퉁이가 날카로운 신경을 툭툭 건드렸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좋은 건 이미 다 나왔기에 더 바랄 게 없는 게 오늘의 디자인이라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수용자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차려 입고 마중 나가야 알현할 수 있는 게 디자인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어딜 가든 한 시도 쉬지 않고, 시각적인 오브제에 대해서 릴레이 코멘트를 날려대는 단짝친구 하나와 얼마 전 더 이상 불평은 그만!’이라고 선언했건만, 제 버릇은 견공에게도 주지 못하는 법인가 보다. 디자인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기 전에, 답답한 가슴을 몇 번 쓸어 내려야겠다. (훅훅)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디자이너로서 난 지나치게 디자인에, 넓게는 시각적인 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눈 첫사랑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오랜만이네.’하며 생긋 웃으면서도 어머, 저 구제불가능성은 어쩔거니. 그건 아방가르드도 아니다, 하고 동공스캐닝을 마쳤으니 말 다했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것은 비단 지큐스런 훈계가 아니라, 억겁의 인류사에 근거를 댄 미학적 근거에 의한 외마디 비명이었으니. 게다가 혹자의 눈에는 괜찮구만, 하고 오후께 참이 스르륵 넘어가듯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제 눈에 안경(상대성)이란 얘기다. 애니웨이, 비주얼이 가지는 자체의 의미와 영향력,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회학적 관계성에 주목하는 이로써 작금의 사태에 대해 울분을 표하고자 한다. 좋은 디자인은 덧붙일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포화상태의 필드에 더 아름답거나, 더 특이하거나, 더 미니멀한무언가를 보태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오늘의 디자인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와도 만나지 못하면서 생산라인에 불을 붙이는 디자이너의 마우스는 허공을 향해 무차별적인 광신호를 보내는 꼴이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 혹은 종말에의 고언이라도, 말이다.

 

문화로서의 디자인 디자인 서울

 

염치도 좋다. ‘디자인 서울이랍시고 디자인 선진국 투어에 동대문 운동장까지 헐었는데, 뭐가 진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행정적인 비효율성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눈혹은 볼 줄 아는 눈이 부재하는 가운데 어떤 의미 있는 작업을 기대할 수 있겠냐는 거다. 기존의 서울이 비디자인적이라고 보는가. 그렇다면 디자인적인대안은 무엇인가. 온갖 난해한 수식어를 모두 떼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선상에서, 단 한마디로 설득할 수 있는가. 지금은 버릴 것과 살리고 갈 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를 중심축으로 도시가 가지는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발전 가능한 색채(개성)을 발견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트렌드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차용하면 서울은 결국 이미테이션에 불과할 것이고, ‘그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것만 찾다 보면 이도저도 아닌 사생아를 만들게 될 것이다. 30년 넘게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카스퍼 쾨니히(Caspar Koenig)는 최근 방한해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공공미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 참여이며, 시민 참여를 이끌어내는 건 작품의 질이다.” 그의 말을 되새기며 디자인 서울을 논하기 전에, 공공미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라도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터페이스가 부재하는 예술과 디자인은 신선놀음에 불과하다. 서울을 ()디자인한다는 발상 자체가 오만이다. 서울이 스스로를 디자인 할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할 때, 비로소 도시는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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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 정치(인)를 지배한다.


 

생활로서의 디자인 국회

 

18대 국회가 오늘 부로 정식 개원했다. 혹자의 말로는 상정되어있는 안건만 해도 삼천여 건이 넘는다는데, 국회 정상화가 과연 며칠이나 갈지 심히 걱정이 된다. (더 솔직한 심정으로는 걱정도 안 된다. 일말의 기대심리가 있어야 걱정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디자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웬 뜬금없는 국회냐고 하겠지만, 통상적으로 정치 관련 뉴스가 나오면 그 그림(찍힌 화면)’을 유심히 관찰하는 이로서 이번 문제를 좌시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수많은 디자인과 마주한다. 전적으로 디자인에 노출되어 있지 않는 시간은 없다. 그만큼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디자인은 남자건 여자건 아이이건 어른이건 상관없이 비교적 공평하게 생활로서의 디자인을 경험하게 된다. 어린 시절, 노태우 전 대통령이 여름철 하얀 마 소재(혹은 혼방) 반팔 셔츠를 입고 나오면(물론 노타이), 그 꼭두새벽부터 어찌 알았는지 국무회의에 앉아있는 이들 모두 꼭 같은 셔츠를 유니폼마냥 입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정치인들이 앉아서 회의를 하는 공간이라는 것도 천편일률적이어서(행정기관도 예외는 아니다) 무겁고 투박한(그리고 쓸데없이 번쩍거리는) 가구에 둘러싸여 있기 십상이다. 어떻게 보면 윽박지르고 멱살 잡고, 때때로 재떨이를 던지는 그들의 행동거지가 그 가구 디자인이 가지는 독성(물질)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일게 한다. 외국의 경우라고 정치판이 다를까 싶지만 서도 적어도 디자인적인 환경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아주 약간의 이해만 있다면 이대로의 디자인이 계속 방치되어도 괜찮을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제안 하나. 휴원 할 때는 열 일 제쳐놓고 내부디자인이라도 바꿔보면 어떨까 싶다. 있던 거라도 모두 치우고 밖에 있는 흙이라도 들여놓으면 사람 사는 공간 같고 좋을 것 같다. (싫음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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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서의 디자인 독일

 

월간 디자인 7월호는 독일 디자인을 특집으로 내세웠다. 한동안 침체되어있다거나, 기존의 이미지를 계속 고수한다는 식의 수동성 때문에 평가절하 받았던 독일 디자인의 현주소를 찾아보자는 취지에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일 디자인의 키워드는 역사와 전통이다. 먼지 폴폴 나는 정의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난 여기서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또는 디자인의 사명(운명)’을 느낀다. 디자인 뿐 아니라 독일 문화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점이지만 독일인들은 시간의 켜를 한 번에 뒤집을 수는 없다고 믿는다. 지금의 변화가 더디고 처진다고 느껴지더라도 시간과 세대를 거쳐 완성된 일종의 궤를 존중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야말로 오히려 더 진보적이고 더 자유분방한 시각적 표현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역사와 전통은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초다. 사사로이 여기거나 무시할 수 있는 성격이 것이 아니다. 흔히들 한국 디자인의 후진성과 불균형적인 수준에 대해 논하곤 한다.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우리의 위치를 간파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의 키를 잡았다면 내 세대에서 끝나지 않을, 다음으로 넘겨줄 수 있는 물음표 하나쯤 준비해두면 좋을 것이다.

 

계급으로서의 디자인 호텔

 

엔디 워홀 세대만 해도 소위 말하는 트렌드 세터들이 모여드는 곳은 나이트클럽이었다. 그곳에서 유행에 대한 이런 저런 품평이 오갔고, 아티스틱한 아이디어가 뭉쳤다 흩어 졌다를 반복했다. 지난 세기의 나이트클럽이 수행했던 기능을 오늘날에는 호텔이 대신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기거나 상대를 중요하게 대할 때 만나는 장소를 호텔로 잡곤 한다. 그것도 더 이상 종을 딸랑거리며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맞선 장소로서의 호텔이 아니라, 트렌디의 최첨단이 호화로운 모터쇼마냥 펼쳐지는 공간으로서의 호텔로서 말이다. 이러한 계급적 허영을 십 보 양보하고 들어가더라도 그가 가지는 모순이란 시급 삼 천원의 쇼퍼가 최고급 송아지가죽의 빅 백을 내밀며 아유, 고객님. 저희가 특별행사기간이라 정말 특별히 이백에 모시는 거에요. 품질 대비 너무 저렴한 거에요.”하는 것과 맞먹는 수준이다. 얼마 전 일 때문에 (남의 덕에) 머물게 된 서울의 한 6성 호텔은 계급으로서의 디자인이 가지는 모순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시내에서의 접근성을 뛰어나게 하기 위해 프론트를 파격적으로 줄이고 다른 층을 운행하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마련한 건 언뜻 보아 모던함을 추월해 버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효율성의 측면에서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할 요소였다. 또한 누가 오더라도 최상의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는 호텔이 아니라, ‘선별된 이들에게만 어쩌면 편하고 어쩌면 불편할 분위기의 호텔이란 건 6성이 최고가 아닌 위압이란 개념으로 대체되었나 하는 의심을 낳게 한다. 디자인의 기본은 뭐니뭐니해도 사용자를 고려하는 마음이다. ‘어때 멋지지’, ‘나 좀 잘났거든하는 식의 거들먹거리는 디자인은 겸손이 배제된 반쪽자리다. 사회 안에, 디자인 자체에 계급으로서의 성격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 계급성이 본질을 잊게 만드는 극약으로 작용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필립 스탁(Philip Starck)이 최근 독일 주간신문 ‘Die Zeit’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 디자인은 모두 쓸데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데 치중한 결과일 뿐이며, 나는 그에 대해서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해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이 시대 최고의 산업디자이너라 칭송 받고, 최근까지도 중국 부호의 대형요트를 디자인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2년 안에 디자인을 그만 둘 것이며, 그보다 넓은 선상에서 개념을 창조하는 프로듀서로서 전업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 말하지만 기존 개념의 디자인은 죽었다. 나올 만큼 나왔고, 갈 때까지 갔다는 얘기다. 한 마디로 디자인이 과잉된 사회에서 더 이상 디자인을 논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거다. 세계는 점차 비물()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경계가 사라지고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자연스레 통합되어 가고 재창조되는 가치 또는 개념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개념의 디자인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디자인이 살아남을 유일한 창구이다.    


2008/07/11 17:50 2008/07/11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