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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24  [미니소설] 어린 여자_번외
  2. 2008/06/23  [미니소설] 어린 여자_4
  3. 2008/06/21  [미니소설] 어린 여자_3
  4. 2008/06/17  [미니소설] 어린 여자_2
  5. 2008/06/17  [미니소설] 어린 여자_1

[미니소설] 어린 여자_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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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방.
여자는, 눈을 감아도 선하게 보였다. 신기하게도 남자의 생김새는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져 가는데, 그의 방만은 또렷했다. 스탠드 드럼 위, 책상, 침대, 의자,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걸려져 있는 옷가지들. 칠레산 와인 박스 안에 놓여져 있던 갖가지 모양의 수건들, 한 번 쓴 것, 새 것, 빨아야 할 것이 구분 없이 놓여져 있었다. 싱크대 위엔 며칠 동안 쌓아둔 설거지 거리가 한 가득. 찻주전자 안에 말라붙은 찻잎 찌꺼기, 흰 반점이 희끗희끗 보이는 커피 잔, 언젠가 쓰다 버린 주름 진 행주. 냇 킹 콜과 크리스 보티, 토이가 제 집을 찾지 못한 채 나뒹굴던 오디오 앞의 전경. 사이사이로 뽀얀 먼지가 보이던 TV 리모콘과 얼룩덜룩한 자국이 보이던 앉은 다리 책상. 보기 흉하게 툭하고 튀어나온 에어컨 호스, 이름 모를 수많은 영수증과 명함들, 카드, 메모, 쪽지와 시계, 풋크림, 발 마사지기, 독일제 연필과 어린이용 스프링 연습장. 푸른 색 바탕에 흰 꽃무늬가 그려져 있던 침대시트와 향수, 화장품, 얼핏 열 개쯤 되 보이던 동그랗게나 샤프한 모양의 안경들. 2년 전 타임지, 손톱 깎기, 알람 시계, 와인 오프너 한 쌍, 남자의 어릴 적 사진, 형과의 사진, 어머니와의 사진, 학위수여식, 그리고 여자친구의 유년시절을 담은 흑백사진. 언젠가 여자는 액자 위에 쌓인 먼지를 닦다 당신 참 예뻤군요.”라고 했다. 말없이 묘한 표정을 짓던 남자는 여자친구에요.”했고, 남자가 방을 나가고 난 후 여자는 잠시 그 사진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꼬리가 살짝 올라간 고양이 같던 눈.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던 그 어린 눈을 잊을 수 없어 여자는 잠시 액자를 엎어두었다. 아냐, 이 자리는 액자가 있던 곳이 아냐. 다시 세워줘야지. 여자는 말없이 액자를 말끔히 닦아주고는 오른 손으로 다정히 가슴을 두어 번 쓸어 내려주었다. 미안, 이것밖에는 해 줄 수가 없네. 나지막이 속삭이며 여자는 기억의 방을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미안, 정말 미안.

2008/06/24 14:05 2008/06/24 14:05

[미니소설] 어린 여자_4

"우리의 눈은 환상과 마찬가지로 바로 눈앞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것보다 막연하고 아련하게 보이는 것에 더 매혹되게 마련이다."         -Caspar David Friedrich

첫만남.

남자는 여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살구색 셔츠에 발그레한 볼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에게 그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여자는 기억하고 있을까. 남자가 온기가 남아있는 커피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무렵, 문가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여자가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이 아닌데, 늘상 만남이 그렇듯, 여자와 남자는 초면인양 고개를 까딱였다. 무리에 둘러싸여 온갖 종류의 술이 오갔고, 시시껄렁한 농담들이 오갔고, 의도치 않은 스침 들이 오갔다. 여자는 눈 앞에 놓인 술잔의 형태가 나선형으로 끊임없이 변화함을 느꼈다. , 남자의 눈은 선하구나. 그래, 그이는 좋은 사람이야. 남자는 호탕하게 웃었고, 여자는 붉어진 볼을 살며시 덮었다.


2008/06/23 11:45 2008/06/23 11:45

[미니소설] 어린 여자_3

해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것보다 더 기분이 더러운 게 딱 하나 있다. 바로 관계에서 해고를 당하는 것이다. 물론 누가 찼냐, 차였냐의 문제만큼이나 해고를 하는 이와 해고를 당하는 이 간의 권력다툼이 의미하는 바는 미미하지만, ‘관계에서의 해고자체가 가지는 부정적 느낌은 상당하다. 여자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감정과 연루된 단어는 단 하나도 내뱉지 않겠다고. 남자는 흐린 눈을 꿈뻑거리며 더 할 말이 없냐고 달랬지만, 여자는 이를 악문 채 미안하지 않은 미안을 쉴새 없이 내뱉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되물었다. ‘내가 도대체 뭘 그리도 잘못한 걸까.’ 주차요원으로부터 키를 건네 받은 남자는 석연찮은 기운을 애써 외면했다. ‘뭐가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그들 모두 처음 그 때를 떠올렸다. 우중충한 토요일 오후에.    

2008/06/21 22:40 2008/06/21 22:40

[미니소설] 어린 여자_2

서른.

스물 여덟일 때는 호환마마보다도 더 무섭게 느껴졌던, 바로 그 나이.

서른의 여자는 불과 2년 전의 자신이 무서워했던 그 실체가 무엇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도 외로울까. 그 때도 사랑할 있을까. 그 때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순수할까. 아마도 그 때 여자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불안한 자아의 실체와 맞닥뜨리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건 뭐니, 하고 싶은 건 뭐니, 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냉랭한 세상을 향해 날 좀 내버려둬라고 속 시원히 외치고 싶었던 건지도. 여자는 비겁하게 서른을 맞이했고, 스물에 꿈꾸던 그리고 스물 여덟에 두려워하던, 그 어떤 서른도 아님에 안도했다. 여자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활짝 웃는 상이었지만, 뭔가 쓸쓸했다. 덜 웃기엔 너무 가식적이라고 생각한 걸까. 쌉싸름한 함박웃음이 묘한 기운을 지어냈다. 웃음에도 나이가 있다면, 저 정도면 딱 서른 정도 같았다. 신기했다.

2008/06/17 22:48 2008/06/17 22:48

[미니소설] 어린 여자_1

마흔.

의혹이 없어지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응석이 늘어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 나이란.

마흔의 남자는 그 어느 때보다 기세 등등 했다. 자신감, 자기확신, 자기애, 자기만족 등등등. 그에겐 자신을 둘러싼 가치가 세상의 전부인양 보였다. 책상 위의 르노어 안경테, 살짝 걸친 폴 미스 캐시미어 스웨터, 와인 셀러 속의 돔 페리뇽, 잘 나가는 건축설계사무소의 여자친구까지도 완벽히 재단된 셔츠의 바늘땀처럼 딱..딱 들어맞았다. 남자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반쯤 웃었다, . 활짝 웃기엔 너무 칠칠 맞아 보인다고 여긴 걸까. 아니면 슬프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슬프지만, 진심으로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걸까. 입꼬리가 5도 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설정이라도 되 있는 것 같았다. 핫하핫하하. 남자의 웃는 소리는 강단 있으면서도 호탕했지만, 표정은 반쯤 웃음 그 이상으로 보여진 적이 없었다.

2008/06/17 00:10 2008/06/17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