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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03  닥터 이라부 – 현대라는 정신병

닥터 이라부 – 현대라는 정신병

 얼마 전 중앙일보 기사에서 서울대 도서관과 하버드대 도서관의 최다대출도서 목록을 비교한 적이 있었다. 미국의 명문대학생들은 고전(古典)을 즐겨 읽는데 반해,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현대작품을 더 선호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덧붙여 고전에서 해답을 찾는 미국의 대학문화에 조금 더 점수를 얹어주는 뉘앙스를 풍겼다.) 이 비교도표에서 미국 대학생의 1위 선호도서로 꼽힌 조지 오웰의 ‘1984’에 대적했던 한국 대학생의(물론 서울대 도서관내) 1위 선호도서는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였다. 오쿠다 히데오를 오늘의, 일본의 조지 오웰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그 유명세나 발행부수로는 누구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거물작가로 거듭났음에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접한 오쿠다 히데오의 책은 남쪽으로 튀어였다. 빠른 사건 전개와 무거운 사회적 이슈를 가볍게(사안 자체를 가볍게 만든다고 해서 내공까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닌) 터치하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인물들의 심리적 갈등을 극한까지 치닫고 가는 재주와 끈기도 내비치면서 말랑하기만 했던 일본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작가가 등장했다고 여겼었다. 이후 가벼운 문고판으로 재발행된 면장선거를 접하면서 닥터 이라부라는 인물을 처음 소개받았고, 거부할 수 없는 단단한 캐릭터가 발굴되었음에 (과장 조금 보태어) 잠시 졸도했었다.

 

 순서가 조금 뒤바뀌긴 했지만, 처음 닥터 이라부가 등장했던 건 공중그네의 에피소드들을 통해서였고, 이후 후속작인 인더풀’, 그리고 면장선거를 통해 오쿠다 히데오는 연속적으로 닥터 이라부의 존재감을 공고히 했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누가 환자이고 누가 의사인지 모를 성격의 닥터 이라부의 여러 에피소드를 무대 위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에 부슬거리는 빗방울을 뚫고 대학로로 향했고, 뽀글거리는 파마머리의 주인공 닥터 이라부는 역시나 정신 없는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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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정신병

 

  이 시대를, 21세기를 살아간다는 건, 어떻게 보든 미친 짓이다. 굳이 정보의 홍수니 무한경쟁시대니 하는 사회학적인 용어를 들이대지않더라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 어떤 시대보다 힘겨워졌다. 누구든 필사적으로 돈 벌고, 필사적으로 심심해하고, 필사적으로 뒤틀려있다. 마치 이 현대의 동의어는 필사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병적으로 깊이 물들어있는 시대가 바로 (안타깝게도) 우리의 오늘이라는 것이다. 정신과란 비단 정신병이 있는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닌, ‘돈 많고, (어쩌면 그래서) 걱정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공식적인 병력(혹은 병과기록)이 없다 해도 오늘을 사는 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다 크고 작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말도 과장은 아니다. 그만큼 모두 멀쩡해 보이지만그저 멀쩡하다고 믿고 싶을 뿐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닥터 이라부는 바로 이러한 현대의 모순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쉴 새 없이 정신 없는 말들을 뱉어내면서도 간간히 환자의 허를 짚는 지적을 하면서 대체 뭐가 진료이고 어디까지가 놀이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극중 닥터 이라부는 환자들에게 (케이스 별로) ‘충격요법이니 역치료니 하는 의학용어들로 권위를 세우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이라부의 모습은 자신을(더 정확히 말해 의사라는 자신의 권위를) 희화화할 뿐, 그 이상의 효과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놀라운 건, 바로 그 자신도 그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 이라부는 치료를 놀이(유희)라고 여기고, 그 안에서 환자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개별적이면서도 총체적인 변수를 이리 저리 놓아가면서 상황을 지켜보는 고도의 체스를 둔다. 과거처럼 A’에 대해 A’라는 식의 처방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감기도 복잡한 불치병도 예컨대 모두 스트레스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현대인의 병적 진화(!)에 깊이 동감한다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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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에 대하여

 

 오픈 런으로 진행되는 투비 컴퍼니닥터 이라부’(2)에서 닥터 이라부 역의 구도균이 차지하는 역할은 매우 크다. 극 전면에 인물의 이름을 내세운다는 것은 극의 중심축 역할이 누구에게 달려있는지를 1000% 전제하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출자나 출연자 모두 극에 앞서 닥터 이라부한국 실정에 맞게, 그리고 연극에 맞게 많은 부분 각색되었음을 알렸다. 물론 일본의 실정과 우리의 실정이 다르고, 소설과 극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요소는 상반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소설 속의 이라부를 먼저 접하고 온 관객이라면 조금 더 괴짜 같은 닥터 이라부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한다. ‘닥터 이라부라는 인물은 단 몇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인물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낄낄거리고, 코너에 몰렸다 싶으면 간호사인 마유미짱을 한껏 불러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에게는 질퍽한 사회상에 적잖게 상처 받은 패잔병(개인)을 때리고 욕하거나 비꼬고 놀리기도 하면서 이라부 식 위안을 주기도 한다. 언뜻 보면 정신을 놓아 버린것 같지만, 그 어지러운 외면 가운데서도 한 가닥 날카로운 통찰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 구겨 넣어도몇 초간 그 모양새를 유지했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만득이같은 면모가 있는 것이다. 배우 구도균은 자신의 코믹한 외모와 특유의 혀 짧은 소리를 전적으로 이용해 어디가 웃음의 유발지점인지를 고도로 훈련시킨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이는 매우 큰 자산이다. 그러나 극중 인물의, 특히 닥터 이라부와 같이 입체적인 인물은 연기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극보다 코믹극이 훨씬 어렵다고 하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니듯이, 유머를 가장한 페이소스를 전달함이 가능해야 한다. 극이나 배우들 모두 초반에는 관객과의 커넥션을 잡는 데 다소 미끌어지는경향을 보였지만, 이내 안정세를 타고 결과적으로는 무사히 세 에피소드를 엮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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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매스컴에서 또한 문학계에서 왜 오쿠다 히데오가 이렇게 주목을 받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8년 전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젊은 세대를 휩쓸고 갔을 때와 엇비슷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당장 이 열기에 동승하기 보단,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내막이 조금 더 환히 보이겠지만, 적어도 확실한 건 밀레니엄 초입에 불안하고 무기력증에 빠졌던 개인이 자력을 찾아가고 생존감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한걸음 나아가 개인과 개인, 사회와 개인 간의 소통을 재개하려는 움직임, 포스트모던 이후의 또 다른 형태의 연대의식, 의사개진과 참여에 대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과 그 안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함의의 접점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대중을(그들의 취향을) 답습하기 보단, 그보다 자신이 믿고 바라보는 대중상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는 것이 마음을 끌어당기는 문학적 자기력을 형성하게 된 것 같다. 오쿠다 히데오의 팬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닥터 이라부의 팬은 되어 줄 의향이 있다. (그대도 동참하시길.)

2008/07/03 12:20 2008/07/03 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