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의 등에도 표정이 있다. 곡을 좇아가기에 급급한 등, 단원의 디테일을 놓치는 등, 지휘봉에 휘둘리는 등처럼 신기하게도 지휘자의 등에는 표정이 있다. 정명훈의 등에는 거대한 지도가 보인다. 검은 색 수트 밑에서 꿈틀거리는 근육의 봉우리와 그 사이의 질곡을 휘감아 도는 악상의 늪. 관객의 눈에 힐끔힐끔 비치는 얼굴의 주름 깊이 지독한 날들의 끝없는 고민이 번뜩이는 것 같아 서늘한 기운이 돈다. 작지만 밝은 할로겐 등 아래 너덜거리는 악보를 잡고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 트럼펫 솔로 나지막이 들어가고 점점 크레센도, 첼로 들어오고 그 뒤를 잇는 더블베이스, 탕탕-둥둥, 그리고 잠시 정적. 흡, 빠-하고 시작. 그의 머리 속은 이미 전쟁 중. 음과 리듬이 엉켰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제 자리를 찾는다. 또렷하기만 한 혼과는 달리, 육의 안구는 꺼풀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잠시 고개를 파묻고 일어나니 동 틀 무렵. 아, 또 이렇게 하루가 시작된다.
후기. 매해 이맘때쯤 열리는 APO(Asia Philharmonic Orchestra)의 공연이 지난 7월 30일 저녁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에서 있었다. 지난 해에도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연주를 보여준 지안 왕(첼로)과 일본 차세대 주자 다이신 카지모토(바이올린), 그리고 정명훈(피아노/지휘)과의 베토벤 삼중 협주곡 협연은 (복잡다다한 관계를 넘어서는) 한중일의 특별한 음악적 만남을 선사했다. (특히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번갈아 가던 마에스트로의 모습이란!!!) 언젠가 정명훈은 ‘지휘자가 되어서 좋았던 점’으로 “더 이상 피아노를 직업적으로 치지 않아서 좋다”라고 했다. 그 때문일까. 지난 해 바르톨리 독창회 때에 이어 이번에도 줄곧 여유 있는 연주를 보여주어 진정한 대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2부에 연주된 말러 교향곡 5번은 장장 70분에 달하는 대곡으로 오케스트라의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품이다. 특히 관 파트의 선전으로 ‘말러 다운 말러’를 만날 수 있었던 멋진 연주였다. (한국 오케스트라의 상대적으로 취약한 관은 예전부터 말이 많았다.) 현의 진중한 스케일을 한껏 감상할 수 있었던(일전에도 오디오 북으로 소개한 적이 있는) 4악장 아다지에토 또한 이번 연주의 백미였다. 정명훈의 서울 시향과의 계약이 얼마 남지 않았다. 늘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그의 연주에 가기에 매번이 애틋하다. 진중함을 담은 마에스트로의 등과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으며.
얼마 전 중앙일보 기사에서 서울대 도서관과 하버드대 도서관의 최다대출도서 목록을 비교한 적이 있었다. 미국의 명문대학생들은 고전(古典)을 즐겨 읽는데 반해,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현대작품을 더 선호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덧붙여 고전에서 해답을 찾는 미국의 대학문화에 조금 더 점수를 얹어주는 뉘앙스를
풍겼다.) 이 비교도표에서 미국 대학생의 1위 선호도서로
꼽힌 조지 오웰의 ‘1984’에 대적했던 한국 대학생의(물론
서울대 도서관내) 1위 선호도서는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였다. 오쿠다 히데오를 오늘의, 일본의
‘조지 오웰’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그 유명세나 발행부수로는 누구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거물작가’로 거듭났음에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접한 오쿠다 히데오의
책은 ‘남쪽으로 튀어’였다.
빠른 사건 전개와 무거운 사회적 이슈를 가볍게(사안 자체를 가볍게 만든다고 해서 내공까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닌) 터치하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인물들의 심리적 갈등을 극한까지 치닫고 가는 재주와 끈기도 내비치면서 말랑하기만 했던 일본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작가가 등장했다고 여겼었다. 이후 가벼운 문고판으로 재발행된 ‘면장선거’를 접하면서 ‘닥터 이라부’라는
인물을 처음 소개받았고, 거부할 수 없는 단단한 캐릭터가 발굴되었음에
(과장 조금 보태어) 잠시 졸도했었다.
순서가 조금 뒤바뀌긴 했지만, 처음 ‘닥터 이라부’가 등장했던 건 ‘공중그네’의 에피소드들을 통해서였고, 이후 후속작인 ‘인더풀’, 그리고 ‘면장선거’를 통해 오쿠다 히데오는 연속적으로 ‘닥터 이라부’의 존재감을 공고히 했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누가 환자이고 누가 의사인지 모를 성격의 닥터 이라부의 여러 에피소드를 무대 위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에
부슬거리는 빗방울을 뚫고 대학로로 향했고, 뽀글거리는 파마머리의 주인공 ‘닥터 이라부’는 역시나 정신 없는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했다.
현대와 정신병
이 시대를, 21세기를 살아간다는 건, 어떻게 보든 ‘미친 짓’이다. 굳이 정보의 홍수니 무한경쟁시대니 하는 사회학적인 용어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 어떤 시대보다 힘겨워졌다. 누구든
필사적으로 돈 벌고, 필사적으로 심심해하고, 필사적으로 뒤틀려있다. 마치 이 현대의 동의어는 ‘필사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병적으로 깊이 물들어있는 시대가 바로 (안타깝게도) 우리의 ‘오늘’이라는
것이다. 정신과란 비단 ‘정신병이 있는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닌, ‘돈 많고,
(어쩌면 그래서) 걱정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공식적인 병력(혹은 병과기록)이 없다 해도 오늘을 사는 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다 크고 작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말도 과장은 아니다. 그만큼 모두 ‘멀쩡해 보이지만’ 그저 ‘멀쩡하다고
믿고 싶을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닥터 이라부’는 바로 이러한 현대의 모순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쉴 새 없이 정신 없는 말들을 뱉어내면서도 간간히 환자의 허를 짚는 지적을 하면서 대체 뭐가 진료이고 어디까지가
놀이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극중 ‘닥터 이라부’는 환자들에게 (케이스 별로) ‘충격요법’이니 ‘역치료’니 하는
의학용어들로 권위를 세우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이라부의 모습은 자신을(더 정확히 말해 의사라는 자신의 권위를) 희화화할 뿐, 그 이상의 효과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놀라운 건, 바로 그 자신도 그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라부는 치료를 놀이(유희)라고
여기고, 그 안에서 환자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개별적이면서도 총체적인 변수를 이리 저리 놓아가면서
상황을 지켜보는 ‘고도의 체스’를 둔다. 과거처럼 ‘병 A’에
대해 ‘약 A’라는 식의 처방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감기도 복잡한 불치병도 예컨대 모두 스트레스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현대인의 병적 진화(!)에 깊이 동감한다는 듯이 말이다.
극에 대하여
오픈 런으로 진행되는 투비 컴퍼니의 ‘닥터 이라부’(2)에서 닥터 이라부 역의 구도균이 차지하는 역할은 매우 크다. 극
전면에 인물의 이름을 내세운다는 것은 극의 중심축 역할이 누구에게 달려있는지를 1000% 전제하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출자나 출연자 모두 극에 앞서 ‘닥터
이라부’가 ‘한국 실정에 맞게, 그리고 연극에 맞게 많은 부분 각색되었음’을 알렸다. 물론 일본의 실정과 우리의 실정이 다르고, 소설과 극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요소는 상반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소설 속의 이라부를 먼저 접하고 온 관객이라면
조금 더 괴짜 같은 닥터 이라부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한다. ‘닥터 이라부’라는 인물은 단 몇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인물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낄낄거리고, 코너에 몰렸다 싶으면 간호사인 ‘마유미짱’을 한껏 불러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에게는 질퍽한 사회상에 적잖게 상처 받은 패잔병(개인)을 때리고 욕하거나 비꼬고 놀리기도 하면서 ‘이라부 식 위안’을 주기도 한다. 언뜻 보면 정신을 ‘놓아 버린’ 것 같지만, 그
어지러운 외면 가운데서도 한 가닥 날카로운 통찰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 ‘구겨 넣어도’ 몇 초간 그 모양새를 유지했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만득이’같은 면모가 있는 것이다. 배우 구도균은 자신의 코믹한 외모와 특유의 혀 짧은 소리를 전적으로 이용해 어디가 웃음의 유발지점인지를 고도로
훈련시킨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이는 매우 큰 자산이다. 그러나
극중 인물의, 특히 ‘닥터 이라부’와 같이 입체적인 인물은 연기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극보다
코믹극이 훨씬 어렵다고 하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니듯이, 유머를 가장한 페이소스를 전달함이 가능해야 한다. 극이나 배우들 모두 초반에는 관객과의 커넥션을 잡는 데 다소 ‘미끌어지는’ 경향을 보였지만, 이내 안정세를 타고 결과적으로는 무사히 세 에피소드를
엮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