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r in You
수년 전,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이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눈을 돌리면 화를 낼 만한 것 투성이인 세상에서 화를 굳이 참으려고만 하지 말고, 잘 어르고 달래라는 내용이 주 골자를 이뤘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를 일종의 ‘우는 아이’라고 비유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있는 형상이다. 짧게 말하자면, 화를 못 내서 안달 난 이들이 즐비해 있다는 얘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부터 하루에 한 번씩은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불덩이’가 불쑥불쑥하고 감정의 에스컬레이터 행을 반복함을 느낀다. 조금 지나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던 게 아닌가 하고 금새 후회막급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왜 화를 그리도 자주 내는 것일까. 더 편리해졌지만 한편으론 복잡하기도 한, 더 풍성해졌지만 동시에 빈곤해지기도 한 오늘에 느끼는 일분일초의 괴리가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일까. 그러한 시스템에 길들여진 우리는 더 이상 참고, 양보하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 진 것일까. 그 답은 시간이 많으신 사회학자들과 심리학자 또는 정신분석학자들에게 일임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일단 내가 이해하는 수준에서의 ‘화’가 어떠한 지점에서 발생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운전: 마음이 한강보다 더 길쭉하게 뻗어있는 이라도 서울시내에서 운전을 하면 서너 평 남짓한 남산 쪽방 만해짐을 느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경남지역이 더 심각하다고 본다.) 대체 양보라고는 모르는 운전자들이 모여있는 곳, 바로 서울이다. 깜빡이를 켜는 순간 옆 차로 뒤편에서 오던 차는 이를 마치 ‘엑셀을 힘껏 밟아라’라는 이해를 하는 모양이다. 끼워주는 경우? 드물다. 이따금 속이 상하는 건, 큰 차를 탄 운전자일수록 좋은 차를 탄 운전자일수록 매너가 더 좋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보다 약한 상황, 불편한 상황에 처해있는 이에게 무한한 배려를 뽐내는 사람은 유명 차 광고의 모델에만 적용된 이야긴가 보다. 결국 초보자건 베테랑이건, 미니카건 대형차던 모두모두 ‘전투태세’를 취해야 한다. 그래야 ‘서바이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혹여나 사고라도 난다면 일단 ‘드러눕거나’, ‘울그락불그락’하거나 택일해야 한다. 이래서 결국은 화가 안 난 상태의 운전자는 아무도 없게 된다. 참 멋진 세계다.
백화점: 오늘도 분당의 한 백화점에서 점원과 티격태격하는 모녀를 발견했다. 지나가는 이가 봐도 너무 한다 할 정도로 옷을 무작위로 갈아입고는 이 코너 저 코너를 전전하던 ‘잠정적 소비자’가 거의 영업에 방해될 정도가 되자 이를 점원이 조용히 타일렀고, 일순간 모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뭐라고? 너 어디 한 번 다시 말해봐.”하며 핏대를 올리기 시작했다. 주변인들은 슬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고, 멀찌감치서 ‘작은 싸움’을 구경했다.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종종 볼 수 있는 이러한 광경들은 꽤나 ‘사사로운 이유’가 시발점이 되는 경우다. 성급하게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존감이 결여되어있는 사람일수록 마른 풀에 불 붙인 듯 ‘파르르륵’하고 타오르게 된다. 그리고 대게는 ‘니가 뭔데 감히 나한테’하는 식으로 귀결된다. 백화점처럼 상품을 사는 동시에 서비스를 제공받고자 하는 소비자의 심리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요구수준이 도를 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심히 서비스 정신이 결여된 점원도 무수히 많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 발생하는 분쟁은 자신이 충분히 대가를 지불한 것에 대해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되었을 때 발생한다. 즉, (소비자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 받고만 하는 자,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자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화를 발산하게 된다. 이럴 때 해 줄 말-욕심쟁이, 우후훗
학교: 부부싸움을 하고 와서 조회시간에 ‘엄한 애’를 붙잡고 화를 내는 선생님은 비단 중고등학교 시절에만 존재하는 게 아닌가 보다. 대학사회에 와서도 나이여하의 관계없이 남에게 ‘화를 뿜어대는’ 이들이 넘쳐난다. 대체 뭐가 그리도 못마땅한 건지 고개가 저절로 갸우뚱한다. 지위가 올라가면서 인격도 자라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그 관계는 늘상 반비례하는 것 같아 그럴거면 차라리 ‘덕 있는 무학위자’로 남고 싶다. 상호 간에 학문적 근거에 의한 발전적인 크리틱이 오고 간다면 이야말로 ‘아테네 학당’을 능가하는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을 텐데. 얄궂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학생과 학생 간, 선생과 학생 간, 선생과 선생 간에 위계질서가 성립되기 이전에 교감작용이 더 활발하게 일어난다면 굳이 화를 내는 사람도 화를 받고 참아내야만 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까. 이런 건 맨날 ‘이뤄질 수 없는 꿈’으로만 남는 법이여서 참 씁쓸하다.
화를 아예 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빈도수를 줄이는 것은 마음먹기 달린 것일게다.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간 사랑이 씩씩거리던 ‘죽일 놈’에서 기억마저 어렴풋한 ‘어, 누구?’로 변해가는 과정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겪지 않았는가. 어른들 하시는 말마따나 ‘용서 못할 일, 이해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법’이다. 화를 참으면 병이 되지만, 화를 잊으면 덕이 된다. 다음 번엔 이렇게 쓰고 싶다. Virtue in You라고.
Trackback URL : http://borakang.com/tt/trackback/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