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소설] 어린 여자_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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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방.
여자는, 눈을 감아도 선하게 보였다. 신기하게도 남자의 생김새는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져 가는데, 그의 방만은 또렷했다. 스탠드 드럼 위, 책상, 침대, 의자,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걸려져 있는 옷가지들. 칠레산 와인 박스 안에 놓여져 있던 갖가지 모양의 수건들, 한 번 쓴 것, 새 것, 빨아야 할 것이 구분 없이 놓여져 있었다. 싱크대 위엔 며칠 동안 쌓아둔 설거지 거리가 한 가득. 찻주전자 안에 말라붙은 찻잎 찌꺼기, 흰 반점이 희끗희끗 보이는 커피 잔, 언젠가 쓰다 버린 주름 진 행주. 냇 킹 콜과 크리스 보티, 토이가 제 집을 찾지 못한 채 나뒹굴던 오디오 앞의 전경. 사이사이로 뽀얀 먼지가 보이던 TV 리모콘과 얼룩덜룩한 자국이 보이던 앉은 다리 책상. 보기 흉하게 툭하고 튀어나온 에어컨 호스, 이름 모를 수많은 영수증과 명함들, 카드, 메모, 쪽지와 시계, 풋크림, 발 마사지기, 독일제 연필과 어린이용 스프링 연습장. 푸른 색 바탕에 흰 꽃무늬가 그려져 있던 침대시트와 향수, 화장품, 얼핏 열 개쯤 되 보이던 동그랗게나 샤프한 모양의 안경들. 2년 전 타임지, 손톱 깎기, 알람 시계, 와인 오프너 한 쌍, 남자의 어릴 적 사진, 형과의 사진, 어머니와의 사진, 학위수여식, 그리고 여자친구의 유년시절을 담은 흑백사진. 언젠가 여자는 액자 위에 쌓인 먼지를 닦다 당신 참 예뻤군요.”라고 했다. 말없이 묘한 표정을 짓던 남자는 여자친구에요.”했고, 남자가 방을 나가고 난 후 여자는 잠시 그 사진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꼬리가 살짝 올라간 고양이 같던 눈.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던 그 어린 눈을 잊을 수 없어 여자는 잠시 액자를 엎어두었다. 아냐, 이 자리는 액자가 있던 곳이 아냐. 다시 세워줘야지. 여자는 말없이 액자를 말끔히 닦아주고는 오른 손으로 다정히 가슴을 두어 번 쓸어 내려주었다. 미안, 이것밖에는 해 줄 수가 없네. 나지막이 속삭이며 여자는 기억의 방을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미안, 정말 미안.

2008/06/24 14:05 2008/06/2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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