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책 (上)

자신을 드러내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사진을 전공한 친구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손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있는데, 손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타고난 손도 있지만, 만들어진 손이 그 사람이 지나온 날을 어느 정도 시각화 visualization한 달까. 잘은 몰라도 스물이 지나면 스스로 얼굴을 만들어나간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책 선물을 받게 될 때도 유사한 경험을 한다. 잘 아는 이건 모르는 이건,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할 때 주는 이의 안목을 암암리에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감성이 풍부했던 한 영문학도는 유학을 떠나기 전, 정현종 전집을 선물했고, 1-man-company를 경영하던 한 지인은 자신 있게 공병호의 신간을 쥐어줬다. 집 앞 마당의 잡초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이들과 그들이 권하는 책 가운데에서 일종의 상관관계를 찾아본다는 게, 비단 황당한 주장은 아니지 않을까.  

 

지난 4년 동안 만났던 가장 매력적인 남자()들이 권한 책들은 하나 같이 그들의 색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들의 재능을 부러워했고 존경했으며 또한 두려워했던 시절.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 책들은 번뜩이는 매의 눈동자와 같은 모양으로 내 감성의 책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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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이충걸 지음,
디자인 하우스
2002



이충걸 (GQ KOREA 편집장)

 모든 것은 우연으로부터 시작했다. 선선한 가을날 친구 하나가 읽어보라고 건네 준 GQ 안에는 난생 처음 접해보는 괴기스런 문체가 버젓이 ‘Editor’s Letter’ 전면을 메우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한 번 읽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판독이 불가한 수준이었다. 60피스짜리 퍼즐을 겨우 맞추기 시작한 아이한테 난데없이 30,000피스 퍼즐을 퍼부은 격이랄까. 수능 때는 존재치도 않았던 학구열과 승부욕이 마른 풀에 불 붙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그의 이름 탓도 있다. 이름이 그 정도면 사람이 무난하진 않을 거란 쌈마이식 추측이 뒤따랐었다.) 무작정 그이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겁 없는 편지(인턴십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와 되도 않는 글 몇 개를 첨부해 부쳤다. 생각지도 않은 연락을 받고, 덩달아 문체만큼이나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말투와 덤으로 상견례를 했다. (그는 외계적 비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이 사람이 나의 가능성을 본 게야라는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는 기대감을 안고 (지금은 이전했지만) 동대문 두산 타워 사십 몇 층인가에 위치한 까페로 향했지만, 헛스윙. 가볍게 바람을 맞고 (그는 물론 덤덤하게 사과했다)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고고하니 다리를 꼬고 있던 한 분의 마리 앙뚜아네뜨를 알현했다. 그 날 만나 나누었던 충격 60은 장편소설로 늘여 써도 충분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미안한 마음에 선물을 준비했다는 그가 꺼내든 것은 지큐 일년 정기 구독권런칭 3주년 기념 사진집도 아닌 자신의 책이었다. 친히 싸인과 사과의 메시지가 담긴 이 책을 받아 들고는 한참을 멍 때렸던기억이 난다. 그는 끝..멋졌다’. 적잖은 이충걸 마니아들은 섭렵했을 책이지만, 일년에 평균 3.5권의 책을 읽는 일반인들에게는 자다가 치는 봉창보다도 더 낯설 책일 줄로 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때 그를 오해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책을 선물했던 그의 제스처가 상당히 귀엽게 느껴진다. 결단코 자신의 책에 자신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자라나는 꿈나무에게 힘내라고 토닥거리는 간접적인 격려였달까. (그 이후 만났던 보그 편집장은 그가 그렇게 친절한 이가 아니라고했지만.) 최근 GQ에서 본 그의 모습은 여전했다. 뿔테 안경테에 스트라이프 셔츠, 루즈한 진에 적당한 스타일링의 헤어하며. 자신의 적잖은 나이를 영원히 흑백 사진 안에 봉인해 버린 것 같은 인상의 남자. 생각보다 주변에 이충걸을 직간접적으로 아는 이들이 많았고, 그들을 통해 들은 온갖 루머의 진상은 두바이의 하얀 모래알 수만큼이나 아련해졌다. 두산 BU에 입사하지 않는 한 그와 재회할 일은 요원하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요즘 GQ가 시들해졌다고 투덜거리긴 하지만) 그가 빳빳한 무솔리니처럼 군림하는 한, 내 심장의 엣지는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을 테니 말이다. Thank you, Mr. Lee.  

 

_다음에 계속 됩니다.

2008/08/03 22:36 2008/08/03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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