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시민

촘스키가 강변했던 ‘불량국가’론은 비단 국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국가의 실체를 받아들인 이래, 시민의 입장에서 국가에 대한 비판은 여러 모양으로 있었지만, 거꾸로 시민이 시민의 자질 또는 양식에 대한 반성은 있었는지 물을 때다. 국가라는 권력과 개인 또는 집단의 권력 사이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는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이러한 파워게임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자의적인 해석이나 오용은 절제하고, 합리적 결정/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에 있어 국가든 개인이든 합리적 이성을 발휘할 수 있느냐는 문제나 공공의 선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느냐와 같은 의문은 여전히 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국가와 시민이 아슬아슬한(?) 계약관계를 유지해왔음을 상기하며 일말의 희망을 걸어본다. 문제는 ‘불량시민’의 출현이다. 이해관계의 사각지대가 생겨나면서 그를 역이용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국가:시민=가해자:피해자’의 공식을 만들어놓고, 상황과 명분을 가리지 않고 그를 적용한다. 최근 한 시민단체에게 예산 외 지원을 해주었는데, 돌아오는 건 또 다른 원성뿐이라던 정부관계자의 말은 왠지 측은하다. 비단 국가와 시민의 관계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간의 기본적 양식이나 예의조차 사라진 것에 대한 한탄이랄까. ‘도움 받는 자는 무조건 더 요구해도 된다’는 사고가 용인되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도움을 주는 대상이 누구이던 간에 그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감사의 마음’은 도움의 양과 질을 떠나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이 있다고 하여 기본적인 행정사안에 조차 자기이해중심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무료함에 시달려 달리는 버스에 총격을 가하는 세태를 보며, 국가 존재의 이유를 되묻기 이전에 시민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결국 ‘막 나가는 시민’까지도 덮어야 한다는 게 슬픈 국가의 운명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