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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에 해당하는 글들

  1. 2008/08/31  청춘이라는 이름의 신 (3)
  2. 2008/08/30  Why Emotion Matters (1)
  3. 2008/08/29  Pi-Male-List (1)
  4. 2008/08/28  리듬 타는 책임감
  5. 2008/08/27  The Dark-made (5)
  6. 2008/08/27  [타임뮤지엄] 오디오북 시리즈 12
  7. 2008/08/26  20대의 초상 II
  8. 2008/08/25  오만과 편견
  9. 2008/08/22  [타임뮤지엄] 오디오북 시리즈 11
  10. 2008/08/21  Artpolis (1)

청춘이라는 이름의 신

일본영화의 문법에 익숙해지기 위해선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건 일본문학을 접할 때나, 일본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생경하지만, 그렇기에 끌리는 것이므로. 세상의 모든 값어치 있는 것들은 기다림을 요구하기에. 일본의 정서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때면 느끼는 점은 그들의 삶은 지나치게 단선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치판단이 우리의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므로 공평치 못할지도 모른다. 감정표현도 사건도 결론도 그 안에 담긴 메시지도, 일상적이건 엽기적이건 간에 하나로 쭉 뻗어나가는 느낌이 있다. 이건 아마도 일본문화를 가르는 어떤 통일적인 기운이라 보여진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자면 그건 매우 얕기도 동시에 매우 깊기도(아니면 깊은데 얕은 척 하는 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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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의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는 퍼즐과도 같은 사건구성으로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메가박스와 아트하우스 모모 정도에서만 상영하여 관람권이 상당히 제한 받고 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지난 해의 <원스>가 그랬던 것처럼 순수하게 관객의 호응도에 따라 상영관 수와 상영일자에 변동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설 칠드런으로 잘 알려진 이사카 고타로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는 바람 속에 실려 지나가면 그만인 청춘에 관한 보고서다. 세 명의 남녀와 그들을 둘러싼 사건, 이별과 성장, 그리고 그들을 연결 짓는 신의 목소리 밥 딜런’. 반전운동의 기수로 잘 알려진 밥 딜런이’Blowing in the wind’를 부르며 사람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자조했던 것처럼 <..>에 등장하는 가와사키, 도르지, 코토미(그리고 시이나)는 그들의 청춘이 어떤 희생을 필요로 하든 삶의 저변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들에게 달지 만은 않은 상처를 남기지만, 그들은 그저 흘러가는 청춘일뿐 그를 억지로 잡으려 하지도 딱히 구분하려 들지도 않는다. 결국 그들은 다르게, 또 똑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자꾸 그들을 있는 그대로내버려두지 않는 세상을 향해 원망을 하기보단 잠시 신을 가둬버림으로써그 힘겨웠던 순간을 잊고자 한다. 순전히 자기위로적인 행위에 불과할 뿐이지만, ‘신의 목소리를 가졌다고 말하던 밥 딜런의 존재(CD와 코인로커 속에 연속플레이 되던 그의 노래)를 잠시 밀폐함으로써 그들이 얻는 동지애적 위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뜨겁고 진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다른 이름으로 청춘앞에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것을 내어놓지만, 이는 모두 신의 시공간안에서 이뤄진 역사이므로 그들은 그 모습 그대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청춘이라는 이름의 신을 코인로커 안에 가둬놓음으로.   

+ 이 영화의 젊은 배우들의 호연은 또다른 발견이었다.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분식집 아들래미로 '미네 류타로'로 출연했던 에이타의 성장하는 모습은 '제2의 오다기리 죠'를 기대케한다. ('후까시'가 아닌 '카리스마'더라.) 소심한 대학신입생 '시이나'역을 너무도 리얼하게 소화해낸 하마다 가쿠 또한 갓 스물이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갠적으로 '천하장사 마돈나'의 류덕환과 캐릭터가 비슷하단 인상을 받았음둥.) 진짜 '가와사키'역의 그 유명한 마츠다 류헤이는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신비한 눈빛으로 '그분만의 아우라'를 감염시키는 위업을 달성했다. 노련한 중장년 배우들의 호연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참 '딴 짓하기 쉬운 나이에' 진지한 연기를 펼쳐보이는 젊은 배우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반짝 거린다. 그들을 격려해주는 방법 중 가장 큰 건, 아마도 직접 표를 사서 극장에 가주는 일이 아닐까 싶다. 가서 박수 쳐주자. 내 안의 잠자고 있던 열정의 자락을 깨워줘서 고맙다고.

 

2008/08/31 21:27 2008/08/31 21:27

Why Emotion Matters

 

정치에서 감정은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 민주당 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힐러리가 흘린 두 번의 눈물은 동정을 자아내기도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감정은 개인의 표현 양식의 하나지만, 정치에서 그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본래의 의도보다는 사후의 해석이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얘기다.

 

지난 28일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 유명한 ‘I have a dream’으로 시작하는 명연설을 한 지 꼭 45년이 되는 날이었다. 대형 축구장을 빌려 민주당 마지막 전당대회를 열며 또 다른 에 대해 이야기한 오바마는 많은 이들의 뺨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관련기사 링크)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문화나 언어,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 받아 왔던 모든 미국인들에게 ‘A better life’를 향한 청사진을 비춰준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실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란 그 어떤 것도 해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명명백백한 진리가 세상의 지배구도에 의해 왜곡되고 침해되는 경우가 너무도 자주, 너무도 쉽게 자행되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비단 흑인이나 이민자가 아니더라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복합문화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그가 던지는 메시지가 진심 어린 토닥거림으로 다가온 듯하다. 그의 단어 하나 하나에 사람들은 위로 받고 또한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감정이 동하는 지점이다.

 

미국의 유명한 쇼 중 하나인 SNL(Saturday Night Live)는 그러한 오바마의 감정적 호소를 비아냥 거리기도 했지만, 오바마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그에게 아무런 느낌도 가지지 못했던 유동투표자들 또한 그의 열정적인 표현양식에 조금씩 호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처칠이 지적했듯 몇몇 체제를 제외하곤 민주주의는 가장 나쁜 정치체제일는지 모른다. 이성적 판단을 배제한 상태에서 다수가 감정을 좇아 (대선과 같은) 국가적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많은 정치체제 안에서 다분히 감정과 연루된 결정들이 이뤄졌고, 그를 통해 역사는 피를 흘리기도 성장을 경험하기도 했던 것 아닌가. 이성과 감성 중 무엇이 더 우월하냐는 지지부진한 논쟁은 근대 이전으로 덮어두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이성을 움직이는 건 단연 이성적인 요소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감성이 작동하는 데는 이성적인 요소가 적절히 배치될 때 한층 임팩트 있는 전달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을 오바마 캠프는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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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무관심이 횡행하는 요즘, 사람들은 감동이 있는 정치, ‘를 알아주는 정치를 원한다. 연대의식이 무색해지고, 긍정적인 태도보다는 냉소가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건 녹록치 않은 환경 탓도 있겠지만, 개인화된 사회에 외로운 개인들이 누군가의 터치를 그리워하는 건지도 모른다. 오바마는 (매케인에 비해) 정치적 경험이 부족하고, 특히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국제 정세에 취약하다고 연일 공격을 당한다. 그러나 외려 오바마는 그래요. 나는 어쩌면 아직 잘 모를지 몰라도 할 수 있어요.’란 말을 우회적으로 ‘Yes, We Can’으로 치환한다. 그럼으로 인해 우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우리를 이루는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미국미래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란 구호를 외치게 하는 것이다. 비록 그 민주주의가, 그 미국이, 그리고 또 그 미래가 그리 밝지만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 아래 포스팅된 영상은 최근 오바마 지지 뮤직비디오로 주목 받고 있는 블로그 <Dipdive>를 통해 널리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HOPE.ACT.CHANGE>는 오바마 지지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이들이 모여서 만든 자발적 참여그룹으로서 앞의 블로그를 공식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매케인 진영이 온라인을 통해서도 오바마에 비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이에 민감한 젊은 층에게 어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도 미쿡의 큰 손들이 움직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쩜쩜쩜하는 식의 음모이론이 실현된다면 정말 인류종말은 가까운 것 같다.)   


  M/V ‘Yes, We Can’



  M/V ‘We are the Ones’


 

2008/08/30 22:56 2008/08/30 22:56

Pi-Male-List

페미언니들이 들으면 기절하실 얘기지만, 많은 분야에서 초정상에 서 있는 이들 중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재계를 살펴보면 그러한 성적 편향은 극단적으로 나타나기까지 한다. ‘알파 걸이니 뭐니 지난 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긴 했었지만, 실세의 권력지도에는 별다른 미동이 (아직까지는) 없는 듯 하다. 문화계로 오면 그 상황은 조금 완화되긴 하지만, 얼마 전 방한한 스웨덴 여성 지도자가 말했듯 어느 정도의 평등은 이뤄졌을 지언정, 완전한 평등은 아직 멀었다는 게 적합한 표현일게다. 다소 미신스런 얘기지만, 신은 평균적인 재능은 다수의 여성에게 주시고, 평균 이상의 재능은 소수의 남성에게 주신 건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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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랑랑 (우) 윤디 리


 

중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랑랑과 러시아 출신의 소프라노 안나 넵트레코가 등장했을 2003-4년만 해도 이러한 기운들이 그 전 신동세대-, 키신이나 사라 장이 활동하던 890년대-와는 선을 긋는 일종의 클래식의 MTV’화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이후 윤디 리, 임동혁(& 임동민), 김선욱 등으로 이어지는 피아노 신예들의 등장은 여성 (신동) 클래식 주자의 행보에 비해 두드러지게 화려한 것이었다. 결국 실력과 외형을 겸비한 예비 스타들이 철저한 마케팅 전략에 의해 노출되는 것이 전혀 새롭지 않게 된 이상, ‘피아니스트 열풍을 넘어선 ‘Pi-Male-List’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지난 수년간 발행된 소비자 분석 서적 가운데 230대 여성의 돈지갑이 가장 큰 타겟이라고 밝힌 내용이 대부분을 이룬다. 그만큼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같은 나이대의 남성에 비해 자기만족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많다는 얘기다. 예를 들자면 최근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는 보이그룹(빅뱅, 샤이니, 2pm 등등)의 공략대상에 물론 틴에이저 층도 포함되겠지만, 그 이상으로 실질적인 이윤창구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일명 누님들’, 230대 여성층이다. 이런 현상을 곰곰이 살펴보면 시장이 ‘Pi-Male-List’의 등장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하등에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보다는 일을, 사회적 시선보다는 개인적 취향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돈 좀 있는) 잠재적 여성 고객층이 형성됨을 예측하고 그 구미에 맞는 패키지를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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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임동혁 (우) 김선욱

 


(
다분히 사적인 호불호가 섞였으나) 그렇다면 그들의 매력은 무엇일까. 차갑게 말해 ‘Pi-Male-List’하나 하나가 완벽한 상품이라고 해도 소위 말하는 오로라, 혹은 자체발광이 없다면 그들은 허울 좋은 벽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시 요즘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는 냉혹하다. ‘물건이다 싶지 않은 물건은 아예 내놓지도 않는다. (결국 이제부터 나열할 들은 다 멋지다는 뜻.) 일단 중국의 혜성부터 시작해보자. 화려한 퍼포먼스로 눈길을 사로잡았던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전혀 스케일에 눌리는 기색 없이 멋진 연주를 선보인 랑랑. 데뷔할 때부터 열광했던 유럽에서 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첫인상이란 천하를 호령하는 중국의 황제와도 같았다. 대륙적인 기질을 넘치게타고난 랑랑은 소품보다는 대곡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고, 작은 독주회보다는 큰 행사에 자신의 200%를 보여주는 예다. 무대매너도 탁월하고, (다분히 미쿡적인) 쇼맨십도 있어 ‘쎄서미스트리트에 출연해 큰 호응을 얻었을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거물 피아니스트로 거듭났다. 그에 비해 쇼팽 전문가답게 유약한 이미지의 테리우스 윤디 리는 얌전하면서도 선이 살아있는 연주를 선보인다. 유약하다고는 하지만, 강단은 살아있는 걸 보면 역시나 지킬 건 지킨다는 인상을 준다. 두 번의 서울 공연을 지켜보면서 랑랑 만큼 드라마틱한 연출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비교대상만 없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전문 레파투아를 만들어가는 연주가가 되지 않을까 한다. 임동혁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한국의 소녀팬들을 클래식 공연장으로 끌어들인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김정원은 논외로 하겠다.) 국제 콩쿨을 휩쓸며 (역시나) ‘리틀 쇼팽으로 명성을 날렸던 임동혁의 매력은 수줍어하는 외모와는 달리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연주를 보여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다양한 협연을 통해서 다소 단독적이었다는 기존의 틀을 깨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임동혁에 비해 조금 더 애늙은이같고 조금 더 깡다구가 있는 피아니스트가 바로 김선욱이다. 상당한 애연가라는 주변의 증언만큼이나 인생의 깊이를 일찍이 깨친 케이스랄까. (허어 -_-) 명망 있는 대기업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앞의 다른 피아니스트들과는 달리 순수국내피교육자라는 사실이 클래식계에서는 기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물론 손열음도, 고봉인도 있다!!!) 게다가 연주 내내 구도자와 같은 심각한 표정과 진지한 해석은 자칫 그의 나이를 의심하게끔 한다. , 그런 조숙함이 그를 오늘의 경지에 이르게끔 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매력 만점인 ‘Pi-Male-List’라면 자본의 계략인줄 뻔히 알고도 넙죽넙죽 상납하지 않겠는가. 때때로 그들의 음악이 아닌 다른 요소에 빠진 자신을 발견할 때쯤이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고상한 취미의 21세기적 진화니깐 눈 딱 감고 속아주련다.  



 베를린 필과 랑랑 협연,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콘체르토 작품번호 1, 1악장
(그의 데뷔시절이니 조금 더 풋풋한 맛이 있습니다요;)  

2008/08/29 23:25 2008/08/29 23:25

리듬 타는 책임감

중세가 금기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발설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도 일정한 발설의 선을 넘어서는 잉여의 시대, 과잉의 시대로 보여진다. ‘너무 똑똑하신 나머지 가만히 입 다물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는 양반들이 사대문 안 이서방 마냥 쫙 깔렸으니, 좀 못 배웠다,싶으면 가만있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그렇게 말이 자유로운 세상에 말이 말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냥 말이 음성적으로 인식되는 소리 이외에는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하는 듯하다. 콕 집어 말하자면, 말에 힘이 말에 영향력이 하나도 없다.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단어가 있으니 그는 바로 책임감이 아닐까 한다. 개인의 책임감, 성인의 책임감, 사회의 책임감도 모자라 기업에도 책임감이 생겨났고(적어도 그렇다고 하고) 심지어는 책임을 운운하는 펀드상품까지 등장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본의 어휘응용력인가!) 결국 책임감이라는 개념의 이와 같은 물()화는 그가 가지는 원래의 무형적 가치를 약화시킨다. ‘책임에 대해 떠들어대는 입은 많아졌어도 그를 실천하는 몸뚱아리는 눈 씻고 찾아봐도 흔적을 볼 수 없다. 그야말로 무책임한 사회가 고장 난 레코더마냥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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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최고 스타는 다름 아닌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SBYO)였다. 젊은 지휘자로 주목 받고 있는 구스타보 두다멜(27)이 지휘봉을 잡은 그 날, 평균 연령 20세를 밑도는 젊은 단원들은 바흐와 말러, 그리고 번스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이어지는 레파토리로 관중석을 열광케 했다. 더 믿기 힘든 사실은 이들 모두, 그리고 두다멜 조차도 한 때 거리의 아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법학자이자 음악가였던 호세 안토니오 아부레우 박사는 30여 년 전, 베네수엘라의 아이들이 거리로 내몰리면서 온갖 범죄에 휩싸이는 세태를 두고 볼 수 없어 ‘El sistema’라는 커뮤니티를 통해 길거리 아이들의 손에 악기를 쥐어주기 시작했다. (관련기사 링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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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시도는 수년 전 겨울 베를린에서도 있었다. 당시 베를린에서 거주하던 25개국에서 온 250여명의 아이들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클래식음악을 들은 적도, 춤을 춰 본적도 없다.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떠돌기만 했던 수많은 이민자 아이들을 데리고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은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한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맞춰 무용공연을 펼친다는 것. 물론 주인공은 250여명의 아이들이었다. 영국 출신의 유명한 안무가 로이스톤 말둠이 수개월간 노력한 결과, 처음엔 시큰둥하기만 했던 아이들의 마음이 가까스로 열리기 시작했고, 결국 너무나도 멋진 무대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리듬 이즈 잇!>은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2004-5년 시즌 다큐멘터리 계를 뜨겁게 달궜다.

 

얼마 전, 뉴저지에 오래 머물다 귀국한 지인으로부터 흥미로운 말을 들었다. 거기 갔더니 우리네 사는 풍경과 확연히 차이 나는 단 한가지가 있더라고 말이다. 우리가 얼마나 악에 받쳐 살았는지가 느껴지더라며 적당한 자기만족에 안주하며 사는 그네들의 모습이 부러웠다고 했다. 비슷한 말은 김지운 감독의 <숏 컷>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유럽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젊은이들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사슴 같은 눈망울을 지니고 살 수 있냐는 감탄이었다. 논리의 비약이 있지만, 책임의식 또는 책임감이라는 것은 나를 잠시 버리고 나 아닌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 몸뚱아리 하나, 나 하나만 챙긴다고 해서 생기는 것은 최소한의 책임감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나아가 나 아닌 다른 사람,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발전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책임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앞서 생뚱맞게도 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결국에 우리가 이러한 책임감에 점점 무뎌지는 것은 그에 대한 구호나 강조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대신 그를 체감하는 각자의 정도가 그에 반응할 수 있을 만한 심리적 여유가 없기에 전체적으로 책임이 약화된(결여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물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손길과 특히 사회 언저리를 서성이는 아이들에 대한 자각이 존재한다. 그저 이를 좀 더 강압적이 아닌 자연스러운 테두리 안에서 함께 놀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하나 둘씩 모여들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책임에 대한 공허한 외침의 무한트랙에서 한 발자국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