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열전2] 돌아온 엄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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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미학, 연극을 말하다


#1 엄사장에게 '비움'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는 밉살맞지 않을 정도로 탐욕스럽고, 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 선상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삶이 '배틀' 그 자체인 그에게 비움은 너무나 큰 희생을 뜻한다. 아니 그보다 앞서, 비움은 그에게 너무나 사치스런 주문이다. 채워도 채워도 부르지 않는 배에게 비워내라는 건 그야말로 '너무한 처사'라는 말이다. 연출가 박근형은 울릉도와 포항을 오가며 엄사장을 통해 '물가의 잡초인생'에 대해 역설한다. 엄사장의 진지한 미션을 통해 소시민 개개인이 가지는 목표점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는지, 고고하지 않은 자세로 친절히 풀어준다. 후반부에 들어 엄사장이 자신이 버린 자식, 엄고수와 함께 해후하고 그 갈등을 극복해나가는 부분에서 '비움이 아닌 비약'을 시도하는 바람에 관객을 다소 당황스럽게 한 부분만을 제외한다면, 이 작품은 꽤나 군더더기없이 잘 비워낸 사례가 아닐까 한다.

#2 엄사장 역할을 맡은 배우 엄효섭과 영필 역을 맡은 배우 김영필의 호연은 '돌아온 엄사장' 의 8할 이상을 책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정도로 그들은 자신이 무대에서 차지할 수 있는 물리적 존재감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있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탤런트 고수의 출연이었는데, 아직도 배우라는 호칭보다는 탤런트가 더 적격이라는 인상을 (안타깝게도) 지울 수가 없다. 특정한 화보 촬영 입장에서는 고수와 같이 팔등신에 이목구비가 훌륭한 청년이 여러모로 각광받겠으나, 소극장에서 이와같은 '배우'는 다른 평범한 마스크에 비해 두배, 세배 이상의 명민함을 내보여야 한다는 게 (필자의 소탈한) 지론이다. 속된 말로, '잘 생긴 것도 죄냐'고 묻는다면, 물론 '아니오'다. 그러나 때때로 소극장 연극의 출연자로서는 '예'라고 답해야 할 지 모른다. 말인 즉슨, 그와 같은 후광효과가 오히려 배우가 연기에 몰입할 수 있는 여지를 감소시키고, 관객의 입장에서도 적절히 배역이나 스토리에 스며들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기에 하는 소리다. 그 외에도 고수는 자신의 (일반인에 비해 10배는) 강렬한 눈빛을 연기에 있어 '시선처리'와 어떠한 방식으로 매듭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더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극단 골목길'의 대표나 '연극열전2'의 프로그래머로 참여한 배우 조재현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고수가 이번 연극에 출연하기로 한 것은 매우 용기있는 결정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결정이 용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전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대 위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실체(감)에 대한 더 깊이있고 끝없는 고민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그래도 또래 연기자들 중에서는 발군의 재기를 보이고 있다고 칭찬과 격려의 말을 덧붙이고 싶다.)

#3 요즘 세상에 누가 배가 고프냐고 한다면 '배고픈 인구 중 7할'이상은 대학로로부터 출발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예나 지금이나 연극을 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고 지치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를 넘어서 '배가 굶주리기에' 연극을 한다는 명분을 넘어서, '영혼이 굶주리기에' 연극을 하는 경지에 오르게 된 것 같다. 모두가 부자이고자 하고 모두가 똑똑하고자 하는 세상에서 그렇지 않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에 대해 담담히 묘사하고 그를 통해 미세한 가치를 곱씹어보는 과정을 우리는 무엇을 통해 얼마나 자주 경험하고 있는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연극인들이, 연극이 그 역할을 자처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돌아온 엄사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왜 연극을 보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해 보았다. 그것은 아마 나와는 동떨어진 인물들과 무대 위에서 만나고, 후줄근한 무대에 매일을 바치고 있는 배우들과 만나면서 탐욕과 허영으로 뒤덮힌 오늘의 우리네 삶을 한꺼풀 벗겨내고자 함이 아닌가 싶다. 가득가득 채우려고만 하는 세류를 거스르며, 내 안의 이물질을 비워내고자 다시 대학로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2008/06/08 14:22 2008/06/0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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