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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17:21 2009/09/30 17:21

엿듣는 소리

오랜만에 신촌에 나왔다. 홍대로 가는 길목에서 요기나 할 요량으로 벅적거리는 맥도널드에 들어섰다. 간단히 주문을 하고 나서 앉을 자리를 찾았지만, 넘쳐나는 손님을 감당할 수 없었던 가여운 종업원들이 매장을 방치(!)해 두는 바람에 잠시 몸을 기댈 곳은 쉬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야말로 시장바닥과도 같은 곳에 두둥실 유영하고 있는 섬과 같은 테이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 앉았는데, . 액션페인팅에 버금가는 케첩의 흔적이란! 가까스로 사정권 밖으로 몸을 붙이고는 약속시간 전까지 다 읽어야만 하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물론 책이 잘 읽힐리는 없었다. 제 아무리 MTV와 함께, 워크맨과 함께 자라난 세대라 할지라도 주변의 부산함이 방사형으로 확대되는 곳에서 무언가에, 그것도 활자에 집중한 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는지 모른다. 허니머스터드의 양 조절에 실패한 치킨랩을 쟁반 한 구석에 방치한 채, 눅눅한 감이 드는 감자튀김을 하나 둘씩 빼내는 손길에 남은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두꺼운 장편소설을 왼손 가득 집어 들고 식어버린 감자튀김을 질겅거리자니, 무언가를 끊임없이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착잡해지는 심정마저 들었다. 책 내용은 사방을 튀어 다니고, 주변의 소리는 귓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냥 대놓고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그것밖에는 이 곳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만 같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른 편, 빅맥세트를 마주하며 먹고 있는 남성 둘, 힙합 차림을 한 대학 2-3학년생, 미필자로 추정

1: 정말 이번엔 막 열정이 솟구쳐. 한 번 진짜 잘해보고 싶다니깐.

2: 그래, 너라도 그래야지.

1: 네 옛날 모습이 딱 내 지금이지 않냐?

2: 그래. 그럴 때가 좋은 거야.

1: . 난 안무가 아니라 노래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어.

2: 하긴. 노래 선정이 쉽진 않지.

1: 그거 들어봤냐? 완전 비트가 없으니깐 뭔가 맞추기도 어렵고.

2: 그래도 요즘 트렌드가 그거던데. 옛날처럼 꼭 비트가 따따따-따따, 하면서 들어갈 필요는 없는 거 같아.

#왼편,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바스락거리며 먹고 있는 여성 둘, 늘씬한 키에 여성스러운 차림, 대학생으로 추정

1: , 진짜 완전 짜증나, 동아리 언니.

2: ? 또 남자들한테 들이대?

1: 내가 솔직히 그 언니 좀 싫어하거든.

2: 진짜?

1: 아니. 뭐 싫어한다기 보단. 그냥 평소엔 괜찮은데, 술 먹은 그 언니가 완전 싫어.

2: 왜 어떤데?

1: 아니, 자기는 막 기억 하나도 안 난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게 어떻게 기억이 안 나냐? 술 먹으면 남자 대하는 게 좀 짜증나. 자기가 완전 오해하게 행동하면서. 딱 보면 마음 있는 것처럼 굴거든.

2: 근데 아니래?

1: . 그래서 우리 동아리 오빠들 몇 명 다 오바했잖아. 완전 좀 짜증나.

까페나 지하철, 또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엿듣게 되는 소리는 즐겁다. 굳이 서로 알지 못해도 보여주기에 들여다보기에 급급한 소셜 네트워크서비스가 판치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우연을 가장한 순간을 포착하는 게 더 스릴 있고 농도 짙다. 흘끔흘끔 쳐다보며 안 그런 척, 시선은 책을 향해 있지만 귀는 쫑긋 세운 채 듣게 되는 무명씨의 이야기들. 오덕후스런 관음증이라해도 좋다. 인간의 본성은 금기시된 것들 너머로 오가기 마련이니. 그런 의미에서-조금 더 귀 기울이셔도 좋습니다. 

2009/09/25 00:23 2009/09/25 00:23